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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신미스님

▲ 지월 은적사 주지스님
한글 날,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안에 숨어있는 큰 사랑과 진실을 만나게 된다. 한글의 創(창)은 세종이었고, 制(제)는 신미스님이었다. 우리에게 낯선 신미스님은 누구이며, 실록에서 세종은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라 했을까! 이는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훈민정음의 창제였다.

 

집현전 학사(신숙주·최만리 등)들의 도움을 받아 세종이 정음을 창제하였다고는 하나 실상은 회의적이다. 그들은 유생들과 함께 하나같이 사대주의와 신분 및 계급사회의 안전을 위해 반대 상소에 진력했을 뿐이다.

 

사실 한글 창제의 모델은 여러 가지 문헌이나 기록으로 보아 범어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범어를 아는 스님은 신미선사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수암당실기(秀巖堂實記)> 에 따르면 그는 소리글자인 ‘범어’에 대한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스님은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모음·자음 소리글을 범어에서 참고하여 28자를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후 <훈민정음> 도 전체가 108자이며 전책의 장수가 33자라면, 이는 모두가 불교적 상징수임을 알 수 있다. 마침내 그 시범으로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행하여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에 토를 달고 번역하여 우리글이 완성되었고 이를 갖고 가서 세종대왕께 보여드리자, 대왕은 이걸로 노래를 한 번 지어보라 해서 나온 것이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 이다. 또한 <석보상절> 은 부처님의 생애를 정음으로 언해를 하게 된 책이다. 세종 이후 약 50년 동안 한글로 만들어진 책의 8할이 불교경전이고, 유교 경전의 번역은 1할 정도에 그쳤다. 만약 정음이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글이라면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세종이 한글 창제 후 굳이 불경부터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튼 세종은 신미선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디딤돌을 놓아준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금동불상을 조성, 시주했으며 유언으로 신미선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慧覺尊子)라는 왕사격의 법호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선사가 실제 <훈민정음> 을 창제했다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숭유억불정책의 시대적 흐름,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 그리고 신미스님을 보호하려는 세종의 절대적 신망일 것이다. 이러한 신미스님의 법과 덕은 세조가 스님을 찾아뵙기 위해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만났던 소나무에게 ‘정 2품송’을 하사한 것과 스님의 초청으로 오대산 상원사로 가는 도중 계곡물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등창이 완치된 불교적 일화로도 유명하다.

 

오늘 날 한글은 국보 70호,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문화 유산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찬란한 정신문화 인프라로 그 위대한 가치는 상상할 수 없다. 하나의 등이 밝아지면서 천년의 어둠이 사라진 것이다(一燈能除暗千年). 어쩌면 인터넷과 SNS의 발달 또한 한글의 우수성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일이란 뿌리와 초석 없이 이룩한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겨레의 숨결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까운 예로 미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 1%가 미국 부의 40%를 점유하며 미국의 정치, 군사, 경제,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크게 깨닫는 사실은 탈무드를 위시한 민족적인 주체성과 정체성이다. 한국은 산업사회의 경쟁과 스피드도 중요하지만 민족의 긍지와 방향성은 더 중요한 것이다. 한국 사람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 지월 은적사 주지스님
한글 날,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안에 숨어있는 큰 사랑과 진실을 만나게 된다. 한글의 創(창)은 세종이었고, 制(제)는 신미스님이었다. 우리에게 낯선 신미스님은 누구이며, 실록에서 세종은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라 했을까! 이는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훈민정음의 창제였다.

 

집현전 학사(신숙주·최만리 등)들의 도움을 받아 세종이 정음을 창제하였다고는 하나 실상은 회의적이다. 그들은 유생들과 함께 하나같이 사대주의와 신분 및 계급사회의 안전을 위해 반대 상소에 진력했을 뿐이다.

 

사실 한글 창제의 모델은 여러 가지 문헌이나 기록으로 보아 범어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범어를 아는 스님은 신미선사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수암당실기(秀巖堂實記)> 에 따르면 그는 소리글자인 ‘범어’에 대한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스님은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모음·자음 소리글을 범어에서 참고하여 28자를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후 <훈민정음> 도 전체가 108자이며 전책의 장수가 33자라면, 이는 모두가 불교적 상징수임을 알 수 있다. 마침내 그 시범으로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행하여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에 토를 달고 번역하여 우리글이 완성되었고 이를 갖고 가서 세종대왕께 보여드리자, 대왕은 이걸로 노래를 한 번 지어보라 해서 나온 것이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 이다. 또한 <석보상절> 은 부처님의 생애를 정음으로 언해를 하게 된 책이다. 세종 이후 약 50년 동안 한글로 만들어진 책의 8할이 불교경전이고, 유교 경전의 번역은 1할 정도에 그쳤다. 만약 정음이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글이라면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세종이 한글 창제 후 굳이 불경부터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튼 세종은 신미선사가 <훈민정음> 창제의 디딤돌을 놓아준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금동불상을 조성, 시주했으며 유언으로 신미선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慧覺尊子)라는 왕사격의 법호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선사가 실제 <훈민정음> 을 창제했다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숭유억불정책의 시대적 흐름,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 그리고 신미스님을 보호하려는 세종의 절대적 신망일 것이다. 이러한 신미스님의 법과 덕은 세조가 스님을 찾아뵙기 위해 법주사로 가는 도중에 만났던 소나무에게 ‘정 2품송’을 하사한 것과 스님의 초청으로 오대산 상원사로 가는 도중 계곡물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등창이 완치된 불교적 일화로도 유명하다.

 

오늘 날 한글은 국보 70호,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문화 유산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찬란한 정신문화 인프라로 그 위대한 가치는 상상할 수 없다. 하나의 등이 밝아지면서 천년의 어둠이 사라진 것이다(一燈能除暗千年). 어쩌면 인터넷과 SNS의 발달 또한 한글의 우수성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일이란 뿌리와 초석 없이 이룩한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겨레의 숨결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까운 예로 미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 1%가 미국 부의 40%를 점유하며 미국의 정치, 군사, 경제,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크게 깨닫는 사실은 탈무드를 위시한 민족적인 주체성과 정체성이다. 한국은 산업사회의 경쟁과 스피드도 중요하지만 민족의 긍지와 방향성은 더 중요한 것이다. 한국 사람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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