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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수몰지구내 지석묘 복원을

지난 5월중순에 진안군 정천면 모정리 여의곡 일대에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50여기 지석묘와 밭농사 유적 등을 발굴하여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갖게 하였다. 현재까지 정밀조사 작업이 계속되고 있고 특히 지석묘와 도로는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형태로 그 당시의 청동기시대 사회구조와 계층의 상황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보고 있다. 본인은 어릴적 이곳을 매일같이 다녔던 곳이라 남다른 감회가 있었고 현지를 답사한 결과 여타 지역의 지석묘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여의곡(如意谷)이라는 명칭은 여실골이라고도 하였다. 여의곡은 산줄 능선의 모습이 여우의 형상이라 하여 이 부락명이 지어진 것 같고 여기에 살기 좋은 마을의 소망을 간직한 의미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이 부락은 지금으로부터 2백여년전에 유(劉) 신(申) 고(高)의 세 성씨가 살았다는 유래가 있고 여우형상의 마을 뒷산이 여의곡을 보호하여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1936년에 공립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모정국민학교가 있었으나 지금은 헐리고 없어졌다. 모정리 망덕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6년간을 다녔고 현재 발굴된 유적은 아침 저녁으로 지나치면서 늘 온기를 느껴왔던 곳이었다. 걸어서 20분이면 학교에 도착하는데 이 발굴지점을 지날때마다 뭔가 모를 느낌을 받곤 했었다. 전답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도랑을 건너게 되면 비옥한 밭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고 그 주위에 크고 작은 납작한 바위덩이가 있어서 그 위에서 놀곤 했었다. 조금 가다보면 늘 외롭게 보이는 외딴집 한채가 있었고 그 집을 통과해야 마을 어귀를 빠져나온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한편, 여의곡의 발굴지점은 수십세기를 거치면서 인근 야산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덮였을 것이고 해마다 토지주의 객토사업으로 두꺼운 표토층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겉흙을 걷어낸 후에야 마을 흔적과 도로 그리고 지석묘등이 드러난 것이다. 타지역의 지석묘와는 달리 커다란 돌받침없이 작은돌 위에 탁상돌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은 아마다 시신위에 작은돌들로 얹혀놓고 그 위에 커다란 돌을 눌러놓아 야생동물이나 도굴범들로 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고인돌은 일명 지석묘라 하기도 하고 외래어로는 돌맨(Dolmen)이라 하였다. 3∼4개의 돌받침 위에 커다란 돌을 올려놓아 탁자와 같이 생겼다 하여 탁자석이라고도 하며 분묘, 제단, 부족의 회의장소의 기능을 하였으며 크기나 규모로 부족장 및 족장의 역량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도내에서는 고창의 고인돌군이 있으며 여의곡 발굴지는 50여개의 지석묘가 3∼4개의 소그룹 형태로 묘 구성을 하고 있어 혈연관계의 작은 공동체 마을이나 족장체제 등으로 역사 학자들은 보고 있다. 앞으로 수몰될 이 지역을 잘 복원하고 이 유적지와는 별도로 떨어져 있는 여의곡 마을의 형성과정과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 하는 것이 연구의 과제가 될 것이다.

 

/추원호(우석대 건축과 겸임교수/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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