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용(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우리가 사는 오늘을 문화시대라고 한다. 교통통신이 발달하는 가운데 전개된 지식정보화의 각 분야를 망라하는 표현이다. 그러면 이런 시대에 있어서 지역문화(地域文化)는 어떤 위상을 정립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면 오래전에 찾았던 부안의 변산면사무소에 소장된 『부설전』이 떠오른다.
그날, 면장님은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 골방으로 안내하여 금고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한지본의 엷은 책 한권이 전부였다. 1992년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된 한문소설 『부설전』을, 나는 그렇게 해서 만났다. 18세기에 필사된 이 책은 삼국시대말 신라 진덕여왕(647-654)대의 수행자인 부설거사의 전기이다. 그는 흔히 인도의 유마(維摩)거사, 중국의 방(龐)거사에 비견되는데, 부안지역에 그 전기소설이 전해지는 것은 이곳이 그의 수행처였기 때문이다.
전기에 의하면 부설거사는 진(陳)씨로, 이름을 광세(光世), 자를 의상(宜祥)이라 하였으니, 부설은 그의 법명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동진(童眞)출가하여 일곱 살에 이미 법문에 통달하였다. 도반인 영조(靈照), 영희(靈熙)와 함께 오대산으로 수도를 떠나 김제 만경을 지나던 길에 구무원(仇無怨)의 집에 머르게 되면서 대처(帶妻)하여 거사가 된다. 주인에게는 묘화(妙花)라는 딸이 있었는데, 부설의 설법을 듣고는 벙어리이던 그녀의 말문이 열리고, 평생을 같이 하고자 하므로 그에 따르게 된 것이다.
도반인 영조와 영희는 부설의 파계에 실망하고 수도의 길을 재촉하여 떠나게 된다. 등운(登雲), 월명(月明) 남매를 둔 부설은 묘화부인과 함께 수도에 전념하여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등운이 출가하여 계룡산에 등운암을 짓고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고, 월명 역시 출가하여 변산에 월명암을 짓고 수도하여 깨달음을 성취한다. 부설 한 사람의 속퇴(俗退)로 두 사람이 출가하고 더불어 일가 네 사람이 도를 이룬 것이다.
오대산으로 떠났던 영조와 영희는 수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부설을 찾는다. 세 사람은 공부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물병 세 개를 달아놓고 각각 깨뜨리자 두 화상의 물병은 쏟아지고, 부설의 것은 물만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수도의 깊이가 스님과 거사라는 형식에 있지 않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와같은 내용을 담은 『부설전』에는 여러 편의 시와 다양한 이야기가 주절주절 얽혀 있다. 그런 부설거사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묘화부인과 함께 수도하던 망해사에 이르게 된다. 김제 회현의 금강 하구에 고즈녁하게 자리잡아 서해의 낙조를 한아름 안고 있는 곳이다. 그 길을 따라 변산의 월명암에 오르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산봉오리가 마치 연화대에 앉아 꽃잎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시인은 「달 밝은 월명암에/ 밀려드는 안개바다/ 삼천육백 봉은 삼천육백 섬이되고/ 소쩍궁 소쩍궁 소리만/ 뱃노래로 들린다.」(이공전 작)고 노래한다. 과연 가슴저리는 이야기가 끝이 없는 곳인데, 이러한 이야깃거리(素)를 문화답사의 프로그램으로 살려보면 어떠할까? 예향인 우리고장은 이르는 곳에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수두룩하니 말이다.
/양은용(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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