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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언어의 보존과 연구

라종일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문득 호남 사투리에 미쳤다. 모두들 근래에는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부쩍 줄었다는, 혹은 이미 드물다는 이야기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긍정적인 현상이라는 마음가짐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다.

 

작년인가, 어떤 일간지에 '언어의 삶과 죽음(Claude Hagege, On the Death and Life of Languages)'이라는 책의 서평을 쓴 일이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세계에서 연평균 25개의 언어가 없어진다. 그는 이어서 언어는 단순한 통신 수단이 아니며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고 우리에게 정체성과 존재의 근본을 담보해 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언어를 잃어버리면 그 언어에 담겨 있는 독특한 문화와 경험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구라파에서의 경험 중에 근대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중앙과 변경' 혹은 '표준화'의 힘에 밀려 지역 혹은 소수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린 경우를 보면서 매우 안타깝게 여긴 일이 있다. 현재는 여기에 세계화의 파도와 이른바 국제공용어(lingua franca)의 압력이 겹쳐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도 한때 '방언'을 버리고 '표준어'를 쓰자고 배우던 기억도 있다.

 

솔제니친 같은 사람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문학적인 면이나 혹은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그 의미를 매우 축소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앞서 그는 혹심한 전체주의 정권하에서 잃어져 버리는 러시아의 독특한 정서와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어휘들을 살려낸 공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수용소 생활 중에도 기억을 살리면서 나름대로 러시아어의 사전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런 어휘들 없이 그가 자신의 경험과 의식을 제대로 살려내어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시인 토마스(Dylan Thomas)의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감동의 큰 힘도 같은 경우이다. 실제로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경험이다. 일제 시대의 홍명희 선생의 업적이나 혹은 작가 한승원의 작품들도 좋은 예이다.

 

최근에 어떤 신문의 칼럼에서, 호남 출신의 저자가 미국 남부 흑인의 방언 번역에 호남 사투리를 쓴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는 말씀을 하신 것을 보았다. 그렇다. 그뿐이 아니다. 한 때 드라마 등 연예물에서도 이 지역의 언어들이 특별한 배역들의 언어로 사용된 것도 근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고인이 되신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야당시절 선거를 위해 호남 사투리를 버리고 표준말을 쓰도록 교습을 받아야 한다는 제언을 많이 들었지만,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어서 따르지 않았다는 말씀을 사석에서 하신 일이 있다.

 

각설하고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에 우리가 지역 언어라는 큰 자산에 생각을 돌려 볼 때이다.

 

최근에 미국 인디안 후손들이 자기 부족의 언어를 보존하기 위한 자원 마련을 위하여 카지노를 경영한다는 기사도 보았다. 우선은 이 지역의 교육기관이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호남 언어 사전의 편찬과 그 학술적 혹은 문화적 의미에 관한 연구와 강의의 개설 등을 생각하고 실천에 옮겨야 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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