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6 23:02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전북광장
일반기사

김일, 그리고 국민교육헌장

쇼였던 프로 레슬링보다 더 거짓투성이였던 유신 이제 그 흔적은 지워져야

▲ 황 재 운

 

문재인 전북시민캠프 대변인

이리시 남중동, 청년까지 20여년을 그곳에서 자랐다. 담벼락, 작은 모퉁이, 길거리 하수구, 구멍가게,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누르고 내빼곤 했던 같은 반 여자아이집의 노란색 초인종. 40대 끝자락에서 이젠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은데, 왜 그리 그 시절 기억은 선명한지.

 

그중에서도 유독 잊혀지지 않는 이름들이 있다. 구자춘 김치열. 집 앞 담벼락에 붙곤 하던 하얀 종이의 담화문에 아래 적혀있던 장관들 이름이었다. 내용은 분간 못하지만 권위적인 단어들로 가득한 대자보의 말미에 연명으로 적힌 장관들의 이름은 그 서체까지도 기억에 또렷하다.

 

요즘 유신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40대 후반인 나로서도 나중에 커서 알게 된 사실 말고는 그 시절은 공백이다. 후배들인 20대 30대들이 유신에 대해 아는 것이 교과서와 책에서 배우고 알고 있는 이상을 결코 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산업화 폐해, 군부독재, 인권 탄압, 유신독재 이런 용어들이 와 닿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그 시절을 그런 단어들로 기억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유신시대는 암기와 강제, 허위와 배신의 시절이었다.

 

이것저것 무조건 외워야 했다. 그 길었던 국민교육헌장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외워야만 했다. 학생 수가 많아 2부제 수업을 하던 시절 선생님 앞에서 헌장을 다 외워낸 아이들은 집에 갈 수 있었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도대체 외우지를 못했다. 해거름이 될 때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낡은 책상위에 무릎 꿇고 앉아있던 기억, 나에게 그런 강제와 암기의 시절이었다.

 

많은 것들이 거짓이고 과장이었다. 어린 시절 프로레슬러 김일은 모든 사람의 영웅이었다. 초등학교 2, 3학년쯤 친구 집 TV에서만 볼 수 있던 레슬링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돈은 없었고, 부모님께 말해봐야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어떻게든 봐야했기에 일단 경기장소인 중앙국민학교로 갔다. 학교 담벼락 위에서 파수꾼들이 도둑관중을 막기 위해 몇 미터 간격으로 서서 장대를 휘둘러댔지만, 나는 결국 철통경비를 뚫고 공짜 입장했다. 하지만 그날 레슬링에 대한 나의 꿈은 사라졌다. 영웅도 사라졌다. 그날 내가 본 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쇼'였다. 그 이후, 난 레슬링을 보지 않았다.

 

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모습으로 국민을 말하고, 부흥을 말하고, 개혁을 말하던 모습이 프로레슬링보다 더 거짓투성이였다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다. 그들끼리의 권력다툼 끝에서 부패와 탐욕, 비리와 부정의 구린내가 진동했다.

 

강산도 3~4번 변할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내 기억에서 그때의 불쾌한 기억이 잊혀지지 않듯이, 그 시절 시작됐던 부패와 탐욕의 그림자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인 박근혜 후보도 정수장학회 영남대학교 육영재단 같은 유신의 유산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다. 무한 권력이 남긴 유산으로 지금까지 지탱해왔지만 막상 대통령이 되려니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하긴 대통령을 권력으로 생각한다면 바꾸지 못할 게 어디 있으랴.

 

하지만 유신은 박근혜 후보에게도 국민에게도 여기까지다. 더 이상 유신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이다. 이노키도 자이언트 바바도 꼼짝 못하게 하던 박치기왕 김일은 그 시절의 영웅이었다. 이제 그런 시절은 다시 올 수 없다. 유신은 이미 관속의 유물이고, 그 흔적들도 가을 낙엽 태우듯 그렇게 기억 속에서 지워졌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