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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 유배 온 황희 정승 초당

▲ 노 상 준

 

남원학연구소 소장

조선조 명재상 황희(黃喜)는 남원에 귀양 와 어떤 모습으로 살았으며 무엇을 남기고 가셨을까? 유배생활 모습을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왕의 지시에 따라 오치선(吳致善: 황희의 생질)이 황희의 유배생활 동태를 살핀 후 복명하는 자리에서 '황희는 초당의 문을 잠그고 손님을 일체 거절하고 운서(韻書)만 탐독하고 있다'고 보고한 일이 있다.

 

광한루라 부르게 된 연유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황희 정승과 깊은 연관이 있다. 향토지에는 선조 황감평이 일제(逸齊)라는 서실을 지었던 옛터에 누각을 세우고 '광통루(廣通樓)'라고 한 것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황희의 아들 황수신이 남원을 방문해 광한루 누각에 올라 쓴 '누정기'에 세종 원년(1418년) 황희가 세자 양명대군의 폐출 불가론을 주장하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 '교하(交河:지금의 파주)'에 유배됐다가 다시 남원으로 이배(移配)돼(1418~1422) 조그마한 누각을 세워 '광통루'라 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에 연유 되었던 것 같다. 그 뒤 여러 차례 개보수를 하고 광통루(廣通樓)를 '천상의 월궁 광한청허지부와 흡사하다'해 광한루(廣寒樓)라 개칭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뒤 1607년에 남원부사가 다시 복원했다. 1855년 남원부사가 대대적인 보수를 한 뒤 '호남제일루'라는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렀다. 광한루원은 한국인의 신선사상과 선비사상이 표출된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정원으로 사적 303호로 지정돼 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야 할 귀중한 문화재이다.

 

황희의 남원 유배 생활을 짐작케 하는 시 한수가 남아있다. 이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시조에서 우리는 그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청계상(淸溪上) 초당외(草堂外)에 봄은 어이 늦었는고

 

이화(梨花) 백설향(白雪香)에 유색황금눈(柳色黃金嫩)이로다

 

만학운(萬壑雲) 촉백성중(蜀魄聲中)에 춘사(春思) 망연(茫然)하여라

 

맑은 시냇물 그 위에 초가삼간

 

여기에 봄철이 찾아오니

 

눈같이 흰 배꽃은 향기가 싱그럽고

 

푸른 버들은 누른빛을 띠어 장차 움이 트려는데

 

먼 산에는 구름이 엉기고 두견새 소리는 처량만하다

 

여러 가지 생각에 갈피를 못 잡는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이런 생활이 5년간 계속됐다. 황희가 남원으로 귀양 온 다음해 1419년 태종은 그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태종은 차차 황희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 시작해 세종 4년(1422) 2월 황희를 서울로 불러올렸다. 황희는 태종을 배알하고 은혜에 감사했다. 이리하여 황희는 5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또 다시 정계에 올랐다. 황희는 18년간 영의정을 지내고 떠나신 만인(萬人)의 재상이다.

 

우리 고장에 그 분의 초당 하나 건립하면 어떨까? 그 분이 머물다간 자리에 아주 작은 초당하나 만들어 유배 시 생활모습을 재연하고 추모의 장을 마련해 청렴한 그 분의 인품을 배우고 올 곧은 선비정신을 기리는 장소로 만들자. 그럼으로써 역사와 문화의 고장인 남원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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