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어떠한 사람일까 생각하면 물고기가 떠오른다. 달콤한 언어로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이 아니다. 한 사회에서 예우 받는 이름이 주어질 때는 그에 따른 사회적 소임도 주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눈을 뜨고 지켜보는 존재, 도둑이 재물을 훔쳐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는 민화 속 물고기의 눈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고 빼앗아가고 짓밟는 순간까지 지켜보는 존재, 그리고 도둑을 지켜보았으면 그게 도둑이라고 말하는 존재가 시인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안락에 취하여 세상을 지켜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 불의에 눈 감지 않는다.
물고기는, 물론 하류의 진흙탕 속에서 코를 박고 사는 물고기도 있겠지만 그런 물고기가 아닌, 그래, 연어와 같은 물고기를 생각하자. 이 물고기는 모천으로 회귀하기 시작하면 잠시도 멈추어 쉬는 일이 없다. 가만히 있다간 거센 물살에 실려 다시 떠내려가 버리기 때문에 한시도 쉬지 않고 아픈 지느러미를 파닥여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좋은 시인은 어떠한 사람일까 생각하면 이런 물고기가 떠오른다. 끊임없이 더 맑은 상류를 향하여 자기를 밀어붙이는 사람, 이런 시인이라면 현실에 안주하거나 안락과 쾌락에 맘을 주지 않을 것이다. 몇 편 좋은 시를 써서 이름을 얻었다고 돌에다가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 따위엔 맘을 주지 않을 것이다.
물고기는 뉘우침이 많은 동물이어서 더 맑은 상류의 물을 그리며 늘 제 몸을 씻으며 항상 물에서 산다. 뉘우침은 시인을 규정하는 가장 큰 정체성 아닌가 한다. 남을 탓하기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 사물을 볼 때마다 거울을 보듯 자신을 비춰보는 존재가 시인이 아닐까? 그래야 불의를 보고 불의라 외칠 때 '말빨'도 서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이웃이 지은 죄까지 대속하려 끊임없이 반성문을 쓴 사람이 시인 아닐까? 죄 없는 영혼들이 모여 사는 천국의 지도를 마음에 품고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존재가 시인이 아닐까?
물고기라면, 아,아, 정말 연어와 같이 저 드맑은 모천을 향하여 거센 물길을 거슬러 차오르는 물고기라면 수정처럼 눈이 맑은 그런 물고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던져주는 달콤한 미끼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리. "내 어찌 쌀 다섯 말에 허세부리는 관직소인배들이게 허리를 굽힐 수 있으랴" '귀거래사'를 쓰고 은신했던 도연명처럼 참다운 시인이라면 세상이 내미는 세속적인 상급에 눈길 주지 않으리라.
며칠 전 한 시인이 절필을 선언한 사건이 있었다. 시대의 어둠에 맞서서 해직을 당하면서까지 두 눈 부릅뜨고 그 어둠을 지켜보고 건강한 민중적 서정시를 썼던 시인, 자연 감수성과 사회의식이 어우러진 뛰어난 서정시를 썼던 시인, 한 때 『연어』라는 어른을 위한 동화로 감동을 안겨주었던 연어 같은 시인이다. 그에게서 한 마리 은빛 찬연한 물고기를 본다. 살아있는 물고기만이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자 권력 아래로 알아서 기어들어간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대의 어둠을 절필로 맞서는 살아있는 시인이 있다. 그가 절필하는 기간 동안 눈감지 않고 드맑은 상류로 가는 물길을 찾아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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