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5 02:25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이승수의 '힐링시네마'
일반기사

[⑤ 영화 '어웨이 프롬 허'] 호수는 인생, 하릴없는…

보호자가 치매 환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의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데…/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드넓은 설원 저편에 검은 산줄기가 가로서 있고, 그 속에 외딴집 한 채가 점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노부부는 스키를 탄다. 11자 형태로 스키를 고정한 채 주로를 따라가는 클래식 주법이다. 뒤로 두 사람이 각각 남기는 자국이 선명하다.

 

집이다. 발단의 장소, 목표 또는 목적지. 남편 ‘그랜트’(고든 핀센트 분)가 부인 ‘피오나’(줄리 크리스티 분)에게 책을 읽어준다. “그만해요. 어차피 금방 잊어버려.” 둘은 ‘브랜트 자연보호 구역’으로 산책하러 나간다. 꽃을 보며 피오나가 말한다. “정신이 없을 때는 꽃이 안 보이는데, 이렇게 정신이 말짱하면 꽃이 보여. 망각에는 뭔가 달콤한 유혹이 있는 것인가 봐.”

 

카메라가 밖에서 집을 응시한다. 창에 불이 하나씩 켜지더니 조금 있다가 하나씩 꺼진다. 피오나가 말문을 연다. “생각 하나가 사라지면 모두 사라지고 말아요.” 피오나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요양병원에 입원한다. 그랜트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홀로 집에 가는 길, 자동차를 탄다.

 

영화 〈어웨이 프롬 허〉는 ‘그녀에게서 떨어져서’ 그녀를 본다는 이야기다. 떨어짐은 몸뿐 아니고 심리적 위치를 포함한다. 그랜트는 이제 44년 동안 알았던, 아니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피오나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병원 규칙에 따라 한 달이 지나 요양병원으로 달려간 그랜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피오나가 그새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녀는 어느새 ‘오브리’(마이클 머피 분)라는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 아니 이럴 수가…?

 

그랜트는 대처방법을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더군다나 아내와 사귀는 남자의 부인 ‘메리언’(올림피아 듀카키스 분)은 왜 그렇게 부인에게 집착하느냐고 묻기까지 한다. 답답한 나머지 한 간호사에게 하소연한다. “아내와의 기억이 너무 소중했는데……. 너무 허무해요. 지나간 모든 게 사실이었나 싶구려.” 간호사의 말이 이어진다. “선생님은 헌신적인 남편은 아니었죠? 어쩌면 부인께서 선생님을 벌주고 계신지 몰라요.”정말 그랬나? 가슴이 먹먹하기만 할 뿐. 급기야 그랜트는 피오나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기로 한다. 그리고 오브리와 피오나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우리 영화 〈인디언 썸머〉의 내레이션이 떠오른다.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여름같이 뜨거운 날.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지만, 그 모두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다만 겨울 앞에서 다시 한 번 뜨거운 여름이 찾아와 주기를 소망하는 사람만이 신이 선물한 짧은 기적 인디언 썸머를 기억한다.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까닭이다.’

 

어쩌면 피오나는 인디언 썸머를 맞고 있는지 모른다. 영화 〈의사 지바고〉에서 비운의 여인 ‘라라’를 연기했던 ‘줄리 크리스티’가 분한 피오나의 모습은 연민이 깊어 더 아름답다. 얼음 궁전, 그 명장면을 잊지 못하는 나는 그녀가 지금 치매 연기가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 있음에도 전의 매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가 세상의 그랜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대한 치매학회장을 역임한 삼성의료원 ‘나덕렬’박사의 말을 통해 정리해 본다. ‘3차원 생물인 인간은 스스로 벽을 만들며 산다. 막혀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4차원에서 보면 벽은 아무 의미가 없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에 답해보자. 첫째, 내가 만든 벽은 투명한가? 나는 모두 안다는 착각에 대하여. 둘째, 나는 무엇인가에 주시당하고 있는가? 공연히 남의 눈치를 보며 사는 이유에 대하여.

 

치매 환자로 살면서 〈치매와 함께 떠나는 여행〉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진 호주의 ‘크리스틴 브라이든’은 말한다. ‘현명한 사람은 놓아줄 줄 안다고. 놓아준다는 것은 한없는 행복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치매 환자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와 흔쾌히 결혼해서 치매퇴치 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폴’이란 사람의 세계 또한 누군가가 놓아줬기에 가능했으리란 짐작을 하게 한다.

 

엔딩에서 피오나는 그랜트를 알아본다. 처음 하는 말이 “당신은 항상 내 기분을 배려해 주었지. 감사해!”다. 둘이 힘찬 포옹을 하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화면은 11자 자국이 선명한 설원을 다시 보여준다. 자세히 보니 그곳은 꽁꽁 얼어붙은 커다란 호수다. 그러니까 노부부는 호수 위에서 스키를 탄 것이다. 호수는 인생, 하릴없는……. 그런가? 영화의 장치가 아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설원, 산줄기에 막혀 더는 진행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집, 창에서 꺼지던 불빛, 스키 자국 등. 삶의 기억과 관련된 은유 아닌 게 없다. 어떤 기억을 만들고 있는가. 또 놓아주기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