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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우리민족에게 산이란 무엇인가] '등산' 아니라 '입산', '정복' 아니라 '합일'

▲ 백두산 천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나의 삶은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어쩌면 풍요로웠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사르트르가 나중에 술회하기를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잃은 것이 행운이었다.” 라고 한 것과는 약간은 다른 맥락이지만 나는 어린시절을 부모님과 떨어진 채로 할머니와 단둘이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또는 ‘열심히 공부해라’ 하는 일종의 간섭을 누구에게도 받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일찍부터 허전하면서도 달콤한 그 외로움의 의미, 그 쓸쓸함의 의미를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나는 그만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 당시를 떠올려보면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내 눈에 뜨이던 산과 강이 나의 유일한 벗이자 스승이었다.

 

요즘에야 개인 집이나 아파트를 막론하고 집집마다 수도 시설이 완벽해서 수도꼭지만 틀면 좔좔 쏟아지는 게 물이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마을의 공동 우물이나 깊은 샘에서 물을 길어다 놓고 먹었다. 내가 태를 묻은 고향마을은 마을 앞 집집마다를 거쳐서 지나가는 작은 냇물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다 그 물에서 나물을 씻고 빨래를 했으며, 그 물에서 세수를 하였고, 밤중에는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마다 물동이를 이고서 물을 길어오면 그 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하얀 사발에 정갈한 물(淸水) 한 그릇을 떠 놓고 내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무엇인가 소원을 빌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나는 바로 앞집인 상관이네 집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서 세수를 하며, 저 물은 흘러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지만 누구 하나 속 시원하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 경남 창녕 관룡산 용선대.

싸리문을 밀고서 우리 집 담벼락 너머에 있는 모정(茅亭)에 나가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면 주위는 온통 산이었다. 서쪽을 내려다보면 성수면 구신리와 백운면 덕현리 그리고 마령면 계서리까지 그 긴 능선을 마치 병풍처럼 드리운 산이 보이는데, 그 산이 옛적에 백색의 신마(神馬)가 내왕했다는 설이 있는 내동산(887m)이고 남쪽인 백암리와 동창리에 걸쳐 있는 산이 갈모처럼 봉우리가 뾰족한 갈미봉(762m)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산삼이 많이 나는 큰덕골이고 그 뒤편에 삼각형인 산이 선각산(仙角山.1,034m)이었다. 바로 뒤편에 인자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이 봉우리가 덕스럽게 생겼다는 덕태산(德泰山.1,113m)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각산 줄기에 있는 산으로 그 모양이 감투 같다는 감투봉이 있으며, 감투봉 건너편에는 감투봉에 있는 장군을 보호하고 있다는 망바우가 보였다. 그 아랫마을이 지대가 높아서 늘 흰 구름이 떠 있다는 백운동(白雲洞)이었다.

 

홍두깨처럼 생겼다는 홍두깨재는 장수군 천천면과 경계에 있는 고개인데, 그곳에서부터 비롯된 백운동천이 웃 흰바우와 아래 흰바우를 지나 전에 사기점이 있었다는 점촌을 지나면 원촌이다. 오일장이 서던 원촌을 지나면 주위에 넓은 바위가 많은 번바우에 이르고, 그 건너가 내동산 기슭에 자리잡은 내동마을이다. 그 마을 앞에서 백운동천과 섬진강의 가장 상류천인 제룡강이 만났다.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상초막골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구름다리라고 불리는 운교리를 지나 마령면 강정리 앞에서 오원천으로 들어가는 부분까지를 제룡강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그 강을 백마천이라고도 부른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낸 그 자그마한 지역만 해도 그렇게 많은 산(山)과 내(川)가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 하물며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이라는 이 나라 산천의 곳곳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 무주구천동.

그 많은 산과 강을 만나기 위해 옛 선인들은 오랫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국토편력에 나서곤 했다. 정시한의 ‘산중일기’, 박종의 ‘동경기행’, 김일손의 ‘두류산 기행’이나 김창협의 ‘동유기’ 그리고 박제가의 ‘묘향산 기행’을 비롯한 수많은 기행문들이 그들이 이 나라 산천을 주유한 뒤에 쓰여졌다. 그 뒤를 이어 현대인들도 수없이 산을 오르고 있다. 지역마다 수없이 많은 산악회를 통하여 산을 오르거나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우리나라의 등줄기인 백두대간뿐만이 아니라 정맥 종주를 나서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많은 산을 오르는 것을 마치 벼슬이나 한 것처럼 떠들며 몇 개의 산을 정복했느니 하며 산을 오른다.

 

옛 사람들도 그랬을까? 옛 사람들은 오늘날의 산사람들처럼 몇 개의 산을 올랐다는 것을 어느 한 사람도 자랑하지 않았다.

 

김일손, 정여창, 김종직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그들은 겸허하게 자기를 돌아보기 위해 산을 올랐고, 그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인간의 슬픔 비애 등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을 준비하기도 했고 그 산을 다녀와서는 아름다운 기행문을 써서 그 자신의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한국 사람이 높은 데에 오르면 반드시 노래를 하는 것이다. 나는 산에 올라가서 노래하지 않는 한국 사람을 본적이 없다. 산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은 아이거나 어른이거나 노래하지 않으면 입으로 웅얼거린다.”

 

조선 후기에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 길모어의 기록이다

 

산기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산을 ‘오른다(登山)’고 하지 않고 ‘산으로 들어간다(入山)’ 고 하였다. 그것은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산을 허전할 때 기대고 싶은 어떤 대상이거나 고향집 또는 놀이 공간 혹은 내 몸처럼 더불어 살아가야할 어떤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의 산수〉라는 강연집에서 산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한민족의 생활에 있어서 그 국토를 존경하는 감정은 심히 소중한 것이다. 국토를 존경하는 태도는 신앙적 종교적으로까지 봐야 비로소 든든하다. 옛날 우리 조상님 들은 신앙적으로 높은 성산(聖山)에 들어갈 때는 대소변을 받아 가지고 나올 그릇을 가지고 가서 행여나 신성한 산을 더럽힐까 조심하고, 또 산중에서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큰 소리로 지껄이지도 않고 마구 몸을 가지지도 아니하여 행여나 산신령을 성나게 할까봐 극진히 조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네 말에는 소중한 산이라 감히 ‘오른다.’하지 않고 반드시 ‘산에 든다.’ 고 하였다. 요 사이 철 부족한 사람들은 혹시 이것을 어리석은 일로 돌리고 코웃음을 칠지 모르지만 산악(山嶽)과 산천강해(山川江海)를 통해서 그네의 국토를 대하여 그네들이 이렇게 겸허하고 엄숙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나는 그네의 총명예지로서 못내 탄복한다.”

 

최남선 선생의 말과 같이 산을 신령스럽게 여겼던 거룩한 전통이 없어지고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 사상에 물들어 ‘자연을 정복한다’ 또는 ‘히말라야 팔천 미터 급 봉우리 몇 개를 정복하였다’는 등 마치 ‘천지(天地)를 자기 힘으로 정복한다.’는 식의 만심(慢心)이 판을 치고 있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만 신순과 융합이 있을 뿐이요. 온전히 그 은혜를 못 받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무궁무진한 천지조화 중에서 정기(精氣)를 좀 끌어다 쓰는 것이 무슨 자연의 정복이겠느냐? 숨이 턱에 닿아서 어느 봉우리에 발을 좀 붙인 것이 무엇이 산악을 정복한 것이냐?”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지금도 정복이라는 말을 부끄러움도 없이 즐겨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산에 얽힌 내력이나 문화유산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한다.”는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격언을 따르기라도 하듯 오로지 앞서가는 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정상을 향해 오르고 다시 빠르게 내려가기에 바쁘다. 그래서 그 산에 산재한 문화재나 아름다운 절집의 고적함은 보려고도 들지 않고, 그 절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러한 폐단을 미리 예감했음인지 소식(蘇軾)은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리 보면 고개요, 저리 보면 봉우리라.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한결같지 않구나.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함은

 

단지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네.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산속에서 산을 보지 못하고 앞서 가는 사람의 발뒤꿈치만 바라보고 올라갈 뿐이다. 그와 같은 일이 아무런 반성 없이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이 수박 겉핥기식의 등산문화, 관광문화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어느 때 산을 오르고 산에서 무엇을 찾았을까?

 

그들은 산을 단순히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오르지 않았으며, 산을 오르면서 사람과 자연의 합일을 체득하고자 올랐고,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위해 올랐다.

 

일부 사대부들은 동남풍(東南風)이 부는 날 산에 올랐다고 한다. 산에 오르다 보면 길옆에 진기한 보물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가, 봄 산은 고사리, 고비, 취나물, 수리취를 비롯한 산나물이 지천이고, 도라지나 잔대, 그리고 그 상긋한 냄새를 풍기는 더덕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대부분의 잎사귀들이 다 사람의 미각을 돋우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연이어 익어가는 온갖 딸기에서부터 싸리버섯, 능이버섯, 석이버섯과 버섯 중에 버섯인 송이버섯이 온 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가을이 오면 가을 산을 수놓는 머루며 다래, 산머루까지 산속에 숨어 있는 보물들과 은밀히 교감하면서, 동반한 길벗과 도란도란 오르다보면 정상에 가까워진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가쁜 숨을 고른 다음에 상투를 풀고서 긴 머리를 풀어헤친다. 얼마나 시원했을까? 1년 내내 망건으로 죄고 있어야 했던 머리를 풀고 바람 부는 방향에 서서 그 머리를 마음껏 날렸는데, 바람으로 머리 빗질을 하는 그 풍습을 즐풍(櫛風)이라고 하였다. 그 즐풍은 방향을 가려서 하였으며 동풍은 좋지만 서풍이나 북풍에는 바람 빗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날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 것인가를 예측한 뒤에 산을 올랐다고 한다. 바람으로 머리 빗질을 한 뒤에 했던 풍습이 거풍(擧風)이었다. 거풍은 햇볕이 잘 내려쬐는 곳에서 바지를 벗은 뒤 하체를 노출시킨 다음에 하늘을 보고 누워서 양기(陽氣)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즐풍과 거풍 습속은, 감추어두고 얽매어 놓았던 생리적 부분을 해방시키는 뜻도 있지만 중요한 목적은 자연 속에 산재해 있는 정기(精氣)를 받기 위한 동작이며 의식이었던 것이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산의 정상에서 하체를 노출시켜 태양과 맞대면시켰던 거풍 습속은 양(陽) 대 양(성기)의 직접적인 접속으로 양기(陽氣)를 받는다고 믿었던 주술(呪術)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풍속이 남도지방에서는 거풍재, 거풍암 같은 이름과 “벼랑 밭 반 뙈기도 못 가는 놈이 거풍하러 간다.”라는 속담 등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는 거풍이나 즐풍 습속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풍속을 따를라치면 풍기문란죄로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평일에도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오는 산, 그 산은 우리 민족에게 무엇이었으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알면서 오르는 것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겠는가?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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