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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장수상회] 치매 환자가 가장 늦게 잊는 건 자기 이름…

오감을 회복하는 일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것 치매예방에 중요하다

벚꽃 흐드러지게 핀 봄날에 가을을 말하는 영화가 있다. 스크린에 황금 물결이 출렁이고 들녘은 들국화 일색이다. 빨간 우체통이 서 있는 시골 길을 버스가 달린다. 코스모스 길에 뿌연 먼지가 자욱하다. 신작로에 소년 소녀가 마주 서 있다. 소녀가 소년에게 들국화 다발을 건네며 이름을 묻는다. “이름이 뭐예요?” 답이 없다.

 

버스 따라 세월이 가고 인생이 간다. 논이 있던 자리에 주택이 빼곡히 들어선다. 한 어르신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된다. 인생의 가을, 바꿔 말하면 사추기(思秋期)를 넘어 선 모습이다. 영화는 이분의 여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묻지도 않는데 어르신이 자기 이름을 말한다. “내 이름은 김성칠(박근형 분)입니다. 별 셋에 일곱 칠, 성칠 이요.” ‘장수상회’라는 마트에서 일하는 이 어르신, 어찌 된 영문인지 홀로 산다. 어느 날 ‘임금님’(윤여정 분)이란 할머니가 앞집으로 이사 온다. 이혼한 딸, 손녀와 함께. 할머니는 동네에서 꽃집을 운영한다. 꽃집 이름은 ‘들꽃’이다. 어디서 본 듯하다.

 

성칠의 밥을 챙, 데이트를 신청하는 금님. 둘은 금방 친해진다. 한시라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다. 뛰는 가슴 진정시키려고 가슴에 손을 올려보지만, 소용이 없다. 영화 <김종욱 찾기> 는 말한다. ‘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다.’라고. 그리고 부연한다. ‘지나버린 첫사랑은 다 산마루의 별이 된대요. 오늘 하루쯤은 내 어깨에 기대 그대의 별을 함께 찾아보아요.’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둘은 틈만 나면 왈츠를 춘다. 일사불란한 스텝에 맞춰. 여생이 스텝처럼 매끄러울 듯 보인다.

 

어느 날 어르신이 동네 공원에서 중얼거리며 서 있다. 무엇인가 말하려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원하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내 이름은, 이름은….” 야속하게도 기억은 어르신이 이름을 꺼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 <장수상회> . 모티프(motif. 이야기의 중심제재나 생각)는 치매 그리고 이름이다. 그 이름은 사춘기적 가을 신작로에서 소녀가 부를 때 대답했어야 할 이름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뭇 사람에게 회자하던 이름이기도 하고. 인생의 가을을 지난 지금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공전하고 있다. 삼성의료원 ‘나덕렬’박사는 말한다. 치매환자가 가장 늦게 잊는 게 자기 이름이라고.

 

사실 그는 다 잊은 채 살고 있었다. 아내도, 딸도, 장수상회 사장인 아들도. 의사의 진단은 ‘전두엽 변성 치매.’ 유일한 기억이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그 무렵 금님씨가 췌장암으로 몸저 눕는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아내를 위해 부르는 노래 <나 혼자만의 사랑> 은 관객의 속을 있는 대로 다 후벼놓는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영화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은 계절〔사춘기와 사추기〕과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의 고리로 각각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도중에 일기장과 데자부〔기시감〕현상 힘을 빌려 기억의 복원을 꾀해 보지만 효과를 보지 못한다. 둘은 화단 돌 틈의 막 핀 꽃(Reflorescence. 봄에 꽃핀 화목이 가을에 다시 꽃피는 현상. 여름에 화아형성이 끝난 개나리, 벚나무, 등나무, 꽃 잔디 등에서 자주 볼 수 있음. 농업용어 사전)을 발견하고 무척 반가워하지만 가을꽃이 될 수 없음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치매 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가족 모두의 눈으로 본 치매 환자의 모습. 영화는 그 들 간극을 눈물과 콧물로 메우라고 요구한다. 따라하면 그뿐일까. 영화 보면서 세상의 수많은 성칠 씨가 떠올랐다. 그분들은 나름의 가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나덕렬 박사는 치매를 예방하는 데 있어 ‘오감을 회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라고. 당부도 잊지 않는다. “걱정 많이 하는 사람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두 편의 영화가 연거푸 떠오른다. 미국영화 <러블리 스틸> 에서 이 영화와 똑같은 상황의 남자 주인공 ‘로버트’는 부인〔치매 상태에서 애인으로 묘사〕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사는 데 지쳤어요. 더는 외롭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을 만났어요.’ 라고. 캐나다 영화 <어웨이 프롬 허> 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이색적인 설정이 눈길을 끈다. 기억을 잃은 아내가 요양원에서 다른 남자와 사귀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남편 ‘그랜트’에게 옆에 앉은 여자가 뭐하냐고 묻자. “아내에게 인생을 주고 있는 거요.”라고 답한다.

 

항상 외롭고, 그리움 사무치는 게 치매 환자 아닐까? “보호자들이 치매 환자를 함부로 대해요.” 어느 요양보호사의 말이 허공에서 메아리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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