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주 오목대에서 후백제의 도성 흔적이 확인됐다. 오목대의 정상부 가까이에 둘러쳐진 토축물이 폐기된 기와와 흙, 돌을 중첩해 쌓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의 성벽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출토된 도자기와 기와 등의 유물로 판단하건대 후백제 시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오목대서 후백제 도성 흔적 확인
원래 고대의 도성은 복잡한 다중시스템으로 구성돼 있었다. 평지에다가 궁궐과 주요 관청이 있는 궁성, 그리고 그것을 보호하는 내성, 다시 궁성과 내성을 보호하는 외성 혹은 나성을 쌓았다. 내·외성의 여러 곳에는 관청과 사찰, 백성과 귀족들의 거주지와 시장과 같은 시설을 두었다. 한편 주변의 높은 산에는 튼튼한 성을 쌓아서 전쟁과 같은 긴급사태에 대비했다. 고구려의 안학궁과 대성산성, 신라의 월성과 그 주변의 산성, 백제의 사비도성과 그 주변의 산성, 태봉 혹은 후고구려의 궁예도성과 그 주변의 수많은 산성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고대의 도성체계를 토대로 오목대의 발굴조사 내용을 후백제의 도성과 관련해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금의 문화촌과 제일고등학교 근처에 궁성이 있었고, 다시 전주동초등학교-해오름아파트-교동아파트-전주시청을 연결하는 성으로 궁성을 보호하는 내성이 있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반대산과 오목대 일대에는 일종의 요새로서 조그만 성이 추가로 축조돼 있었는데, 평지에 있는 궁성과 내성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담당하던 성이었다.
이상의 성들은 모두 흙과 돌, 폐기된 기와를 혼합해 쌓았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고, 후백제 이외 다른 나라의 도성과는 관문 역할을 하는 성이 평지에 별도로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외에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 곳곳에 유사시를 대비한 본격적인 석축 산성을 추가로 쌓아서 운영했는데, 동고산성과 남고산성, 서고산성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렇게 오목대의 성벽은 다중의 도성체계 하에서 후백제의 궁성 및 내성으로 통하는 관문성으로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확인되면서 궁성과 내성에 보다 쉽게, 그리고 구조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전주시의 급속한 도시화 때문에 후백제 도성에 대한 이해가 오랫동안 승암산의 동고산성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비로소 산지와 평지를 결합한 새로운 접근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도 지금부터는 오목대 성벽을 시작으로 도성에 대한 추가조사와 학술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 같다. 또한 학사(學史)적으로도 전반적인 후백제 연구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되며, 더 나아가 신라와 후고구려를 포함하는 후삼국 연구의 진전으로도 이어질 것 같다.
한편 눈을 돌려 전주시의 입장에서는 고고학적 물증을 토대로 한 ‘고대국가의 왕도’로 한 단계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됐다. 아울러 전라북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최초로 한반도의 역사에서 전라북도가 주인공이었던 시간을 되찾는 셈이 됐다. 자연스럽게 패배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전북 도민이 자긍심을 되찾게 될 수 있게 됐다.
추가 조사·학술적 논의 본격화 기대
결국 오목대 성벽 발굴을 통해서 후백제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헌에만 머물러 있다가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해서 화려하게 되살려낸 가야사를 참고한다면, 지금야말로 모두가 힘을 합쳐 후백제사를 다시 써나가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전라북도를 비롯한 전주시, 전북 도내 발굴조사기관과 연구기관의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해본다. 또한 전북 도내의 언론인 및 정치인도 후백제를 되살리는데 적극 협력해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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