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영혼의 음악’ / 이 해가 가기 전에 시집 한 권이라도
요즈음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우리가 산업화 과정을 지나면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였지만 이제 어느 정도 그 문제는 해결되고 다소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정신적 양식을 촉구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인문학 중에서도 문학, 그 중에서도 시에 대한 교양이 매우 유용한 때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시는 늘 삶의 옆에 동반하고 있었다. 특히 상류지식층 선비들은 시작詩作이 필수 교양과목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시는 우리생활에서 멀어져 버렸다. 모든 가치가 재화 혹은 물질의 질량으로 척도 되는 시대에 시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점과 현대의 시들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이유일 것이다.
시는 어렵기만 한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언어생활에서는 시적언어를 쓰는 경우가 참 많다. 나의 할머니는 6.25전쟁 때 전쟁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사셨다. 전쟁이 끝났어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해마다 정초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셨는데 “장마 끝에 하늘이 열리니 해가 세상을 비치도다” 또는 “춘풍에 눈이 녹으니 고목에 꽃이 피도다” 이런 말을 듣고 할머니는 얼굴에 희색이 돌며 꼭 아들이 돌아오리라 희망을 갖곤 하셨다.
할머니는 동네의 홀어미 아주머니를 가리킬 때는 “쯧쯧 저이는 짝잃은 외기러기야”라고 말했다. 그런대 이런 말들이 시 표현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비유적 언어 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끌어다 쓰는 속담들도 거의 시적 언어들이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께” 또는 “한 몸에 두 지게 질까” 등의 말들은 비유적 언어들이다. 속담이란 말 그대로 속세의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즉 우리가 흔히 쓰는 수수께끼, 동요, 가요 등의 노랫말들에도 이런 비유적 언어들이 숱하게 쓰이고 있다.
가령 “머리 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이런 수수께끼와 “연애 할 때는 토끼요 결혼하면 여우요 나이가 들면 호랑이가 된다” 여자에게 구박받는 남자의 비아냥거림의 농담까지도 시적언어인 비유의 화법이다.
왜 우리는 언어생활 속에서 이런 비유어를 쓰는 것일까 그것은 이런 비유어를 사용할 때 보다 인상적이고 효과적 전달이 이루어지는 것을 터득한 때문일 것이다.
시는 언어에 봉사하는 일 이라고 사르트르는 말 한바가 있다. 비유적 언어는 말의 영역을 확장하는 창조적 언어 사용법이다. 말은 사고思考를 낳게 되고 이 사고에 의해 문화가 창조 되는 것이므로 언어에 봉사하는 일은 곧 문화에 봉사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다시 시와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심성을 부드럽고 여유롭게 하고 창조적 활력을 갖게 하는 시를 가까이 하는 일은 인문학적 사고를 찾아가는 지름길 이라고 생각한다.
“시는 영혼의 음악이다”는 말이 있다. 영혼에서 자아 올라오는 것, 즉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시라고 한다면 기계의 시대, 돈의 시대에 야위어가는 우리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 매우 유용한 것이 시라는 생각을 한다. 이 해가 가기 전에 한 권의 시집이라도 읽어보자. 지금 서점의 한 구석에 박혀 눈에 잘 띄지 않는 시집을 뽑아 먼지를 털고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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