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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산 양고살재를 넘으며

임영섭 고창군 기획예산실장

우리나라 각 지방에는 그 지역의 인물과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설화가 만들어 지고 그와 연관되어 형성된 지명이 더러 있으며, 고창의 영산 방장산을 넘어 장성군 백양으로 가는 고개인 양고살재가 그중 하나이다.

 

고창에서 태어나 60고개를 넘게 살아오면서 방장산을 등산하다보면 중학교 시절 양고살재를 넘어 백양사까지 걸어서 소풍을 갔던 생각과 증조부 묘소에 성묘를 다녔던 옛 추억이 떠오르는 고갯길이기도 하다.

 

방장산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사(高麗史)』등에 방정하고 평등하다는 의미의 방등산(方等山)으로 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높고 장엄하여 반밖에 오를 수 없다는 의미의 반등산(半登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큰 인물이 나올 고장임을 경계하여 임진왜란때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차단하려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때도 반복되었다.

 

방장산 양고살재는 병자호란 때 고창 출신 박의(朴義) 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이자 청의 개국공신인 적장 양고리(陽古利)를 사살한 것을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설화에 의하면 박의장군이 양고살재에서 총을 쏘아 사살하였고 그도 역시 붙잡혀 목을 베었다고 하나 기록에 의하면 근왕군 소집에 의하여 1637년 1월 4일부터 6일까지 전라도 병사 김준용이 근왕군을 거느리고 경기도 용인근교 광교산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청군 장수 2명과 양고리를 사살하는 병자호란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양고리를 사살한 이가 박의 장군으로 보여 지나 남한산성의 인조와 합류하지 못하였다. 종중의 기록에 의하면 박의와 아우 인순이 함께 근왕군으로 참전하여 양고리를 사살하였으나, 인조가 항복 화약을 함에 따라 이를 숨기고 낙향하여 살았다고 한다. 고창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자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수많은 의병을 배출한 의의 고장이므로, 박의 장군 형제와 양고살재 이야기도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적인 조사와 재조명을 통하여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높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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