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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역자

▲ 이재규 작가
선생들에게 많이 맞고 자랐다. 60년대에 태어난 우리 세대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장교들이 권력을 잡은 나라에서 학교는 또 하나의 병영이 되어 ‘일사불란 총화단결’을 말단까지 관철했다. 교사들은 거대한 폭력체계의 끝자락에서 지극한 ‘사랑의 매’로 아직 솜털이 부성부성한 아이들의 맨살을 수시로 터지게 했다. 그날따라 기분이 몹시 안 좋았던 선생이라면 맨손으로 얼굴을 후려치는 것도 부족하여 대나무 뿌리, 슬리퍼로 아이들을 잡았다. 감히 말대꾸를 하면 그야말로 먼지 나게 맞았다. 그 무차별의 폭력 아래 부서져 내린 교실에서 우리는 김칫국물 흐르는 도시락을 까먹고, 교련 선생의 베트남 참전 야사를 무한반복으로 전해들으며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우지 못해 조바심을 쳤다. 그것을 바꿀 수 없는 세상의 질서로 알고 살았다.

 

천박한 자들에게 굴신해 온 우리들

 

어디 학교뿐이었을까. 집집의 식단과 성생활, 불러야 할 노래, 두발과 치마의 길이까지 관여하는 ‘관’은 무소불위의 힘이었다. 김남주 시인이 “집안에 면서기 하나 순사 하나 산감 하나 나면 왠만한 바람엔들 문풍지가 울까부냐”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썼듯 공무원은 출세의 권력이었고 나라 자체와 같았다.

 

87년 6월항쟁은 일방통행이었던 국가권력에 수십 년 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제6공화국에서 국민은 대통령을 제 손으로 선출하는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되찾았고 91년 지방자치선거를 거치면서 지방권력을 일부 제어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아래로부터 교사조합이 시도되면서 학교 현장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87년 대선의 패배로 낡은 것을 제대로 한 번 청산할 기회를 놓치고 긴 우회를 거치면서 수구세력은 더 교묘하고 강건하게 살아남았다. 박근혜의 집권은 수구세력이 이제 시대정신까지 장악하며 완벽하게 복귀한 것만 같았다. 저들의 웃음소리가 권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모욕하는 집권자의 변설을 귀에 담자니 하루하루가 참으로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그랬는데 기적처럼 구중궁궐의 권력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 오만과 무지가 만든 제 수렁에 빠진 것이다. 매일 더 추악한 민낯이 폭로되는 박근혜 세력을 보면서 이들이 사태를 명민하게 알아차리고 일찌감치 퇴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행정부, 검찰 등의 공안기관, 언론 곳곳에 틀어박혀 있던 적폐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낼 수 있었다. 후안무치인 저들의 항변권을 법이 허용하는 데까지 보장하고 매우 답답하게 진행되는 탄핵 절차를 지켜가는 것도 ‘공화국’의 실체와 한계를 몸으로 겪어내는 소중한 시간이다.

 

마침내 공포 기술자 김기춘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 머리칼을 싹둑 자르고 슬리퍼로 모욕하며 몽둥이 찜질을 가했던 평범한 얼굴의 교사들, 경찰들, 지극한 냉소의 눈빛을 흐트러뜨리지 않던 검사와 판관들이 떠올랐다. 악몽이 참으로 길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선생들을 용서하지 못한다. 작은 김기춘들, 부역한다는 죄의식도 없이 완장을 찬 자들. 아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용서하지 못한 것은 저토록 천박한 자들에게 턱없이 굴신해온 우리들 자신일 것이다.

 

오랜 모욕의 시간, 확실하게 선 그어야

 

다가오는 선거에서는 유신의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50대가 캐스팅 보터라고 한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이 오랜 모욕의 시간에 확실하게 선을 그을 사람. 오십의 나이가 자랑스러울 그 시간을 기다린다.

 

△ 이재규 작가는 치유의 글쓰기워크숍 ‘작가의 방’기획자이고, 저서는〈시와 소설로 읽는 한국현대사〉 〈사람의 숲에서 길을 묻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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