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복지법 만들고 복지재단 설립 됐지만 예술가 빈궁 개선안돼
“문화예술이 밥 먹여 주냐?”
이런 비아냥은 이제 구식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밥만 먹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서 문화는 어느 한 지역이나 나라의 대외 이미지를 좌우하는 브랜드로서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술가를 가장 빈번하게 수식하는 단어는 ‘가난’ 아닐까 싶다. 가난은 모더니즘 사조가 예술계를 지배하던 시기부터 예술가들을 따라다녔던 꼬리표였다. 예술 그 자체만을 위한 예술이라는 가치 아래 가난은 예술작품의 고결함과 깊이를 더해주는 혹독한 주문이 되었다. 음악의 아버지라 추앙받는 바흐도 가족의 생계를 걱정했고, 세기의 천재 모차르트도 빚에 쪼들렸다.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슈베르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그래도 반 고흐에 비할까.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고독하고 비참하게 살다 권총 자살로 37세의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반 고흐의 작품들이 모두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생전에 단 하나의 작품밖에 팔지 못했다. 다른 나라 예술가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의 인생도 극심한 빈궁과 처자식을 일본으로 보낸 후의 애절한 고독으로 가득하다. 예술가의 숙명이라고 해야 하나. 예술가의 가난은 시대가 변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물론 본질적으로 예술의 미학적 가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의 ‘노동’과는 대항적 위치에 놓여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직시하면 예술가처럼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 착취를 당하는 직업군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시간제 아르바이트의 시급에도 못 미치는 대가와 전문적 기능과 기술을 제공하면서도 사회적으로 받는 무시와 편견은 이들로 하여금 자기 직업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각종 예술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직업적 특성을 ‘감정노동’이라는 단어를 생성시킴으로써 설명하듯 예술 노동 또한 무엇보다도 ‘정신노동’이라는 기본 전제를 그 특징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행위는 육체적 노동을 수반하는 정신적 노동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술인복지법이 만들어지고 복지재단도 설립됐다지만 예술가들의 빈궁한 처지가 개선됐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예술가를 돕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자기가 좋아 선택한 예술인데 왜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도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영업자가 망하면 국가가 도와주는 것을 보았냐는 말이 덧붙는다. 어떤 이들은 예술가는 가난해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일한 대가만큼은 정당하게 지급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예술가는 가난하기 마련이라고 외면해야 할까. 열심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상황이 정상은 아니다. 예술가들도 돈 버는 일이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경제에만 매달려 물질적인 예술을 창조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문화예술은 지역·국가의 브랜드로서만이 아니라 국민과 지역 주민으로 하여금 문화 체험과 예술 경험을 통해 ‘긍정적 판타지’와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하고 사회와 삶을 진지하게 탐색할 수 있도록 이끄는 매개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은 건강한가? 아직도 문화예술인들이 춥고 배고픈 세상은 한낱 공허한 ‘빈 수레’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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