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선임기자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견디지 못한 고부 민중들이 관아를 점령한 것은 1894년 1월 10일이었다. 전봉준과 민중들은 이후 세를 확장하며 고부군 일대를 장악한다. 그러나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와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과 탄압으로 농민군은 해산되고 전봉준 등 지도부는 피신한다. 이들이 다시 모인 곳은 고창 무장. 전봉준은 이곳에서 무장 대접주 손화중을 설득해 농민군을 다시 모아 진영을 갖추고 수탈과 폐정을 혁신하기 위해 전면적인 봉기에 나선다. 동학농민군을 본격적인 혁명의 길로 이끈 ‘무장기포’다.
음력 3월 21일(양력 4월 25일), 고창 무장현 구수(구시내) 들판에서 4천여 명의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내세우며 선포한 포고문이 있다.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김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군신과 부자는 가장 큰 인륜으로 꼽는다”로 시작되는 포고문은 충효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의 전통적 기본 윤리를 깔고 있으면서도 “신하된 자들은 한갓 봉록과 지위만을 도둑질해 차지하고……안으로는 나라를 돕는 인재가 없고 바깥으로는 백성을 갈취하는 벼슬아치만이 득실거린다”며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매섭게 질타한다. 포고문은 처음부터 끝가지 농민군들의 절박한 결기를 명쾌하고 힘 있는 언어로 담아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다.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는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죽고 사는 맹세를 하는 바이니.....”
무장기포의 궁극적인 목적이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의 당당한 대의에 있음을 그대로 담아낸 포고문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무장기포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더 새롭게 확인시켜주는 근거다.
무장기포가 올해 개정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수록됐다. 그동안 학계의 논란 속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무장기포의 의미가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될 수 있게 되었으니 반가운 일이다.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을 추진해온 고창군이 역사적 공간의 성지화사업에 큰 힘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반갑다.
올해 126주년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은 사실 어둡고 긴 세월을 지나고서야 비로소 온전한 이름을 얻었다. 지난해 국가기념일(5월 11일 황토현전승일)로 제정되면서 왜곡되었던 역사의 면모를 바로 세울 수 있는 통로가 열렸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유적지 발굴과 보존, 세계 혁명사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 작업 등 크고 작은 과제가 적지 않다. 갑오년 역사에 국민적 관심이 더해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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