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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기를 부린다는 것

송준호 우석대 교수
송준호 우석대 교수

‘객기(客氣)’라는 말이 있다. ‘공연히 부리는 호기’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고 했으니, 그 또한 객기에서 나온다. 한자말 ‘객기’의 ‘객(客)’은 ‘손님’ 아니면 ‘여행을 떠난 사람’이다. 그러니까 여행자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바로 객기다. 낯선 곳에 갔으니 아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객’은 ‘남[他人]’이기도 하다. 그의 기운을 내 안에 들여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일을 꾸미거나 실행하는 것, 바로 객기다.

지난 세밑에 친구가 운영하는 치과의원으로 사랑니를 뽑으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저녁에 즐거운 술자리가 잡혀 있었다. “내가 말이지, 사실은 오늘 저녁에 술 약속이 있거든? 이빨을 뽑고 저녁에 술을 좀 마시면 안 될까?” 발치 기구를 손에 쥔 친구한테 나는 좀 실없이 물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곧장 돌아왔다.

“술? 거, 좋지.” “그게 아니고, 술을 먹어도 뒤탈이 없겠느냐고?” “아니, 십중팔구는 아플 걸? 염증이 생길 가능성이 아주아주 높거든.” “그런데 날더러 마셔도 된다는 거야?” “이 사람아, 친구가 치과의산데 자네는 뭐가 걱정인가? 아프면 나한테 또 와. 공짜로 치료해줄게.”

그 말이 내게는 좀 어이가 없게 들렸는데 친구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길지도 않은 인생, 뭐 별거 있는가? 어쩌다 한 번씩은 말이지,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질러버릴 줄도 알아야 되는 거여.” 그 소리를 듣고 ‘자네한테 그런 걸 물어본 내가 그렇지.’ 하면서 속으로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어금니에 솜뭉치를 물고 치과를 나서다 보니 인생이 뭐 별거 있느냐고 오히려 되묻던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이었다.

‘밤에, 전라선을 타보지 않은 者하고는 / 인생을 논하지 말라.’ 안도현 시인이 쓴 <인생> 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다. 밤에, 그깟 전라선 열차를 한두 번 타본 사람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다고 시인은 이런 식으로 ‘도발’을 감행한 걸까. ‘사람’ 대신 ‘놈[者]’을 굳이 가져다 쓴 건 또 뭐란 말인가.

괜한 딴지였다. 비 내리는 호남선이든 부산으로 가는 대전발 0시 50분 기차든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그걸 새벽에 탔어도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놈’이면 어떻고 ‘사람’이면 또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인생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라는 것. 시인은 어쩌면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은 ‘새벽에 경부선’을 타본 ‘놈’하고도 얼마든지 인생을 논할 수 있으니 부디 오해하지는 말아주시라는 것.

살다 보면 온갖 일을 선택해서 겪게 마련이다. 대개는 원칙과 규범에 따른다. 유불리를 따지기도 한다. 그런데 가끔은 뭔가에 속수무책으로 홀린 듯 오로지 솟구쳐 오르는 감성에 이끌리기도 하는 것 또한 삶의 한 부분 아닐까 한다. 뼈아프게 후회하더라도 그런 시간 역시 소풍 나온 우리네 삶의 중요한 대목임을 믿어서다.

통장 잔고 따위는 거들떠보지 말고 오랫동안 꿈에 그려온 북유럽 여행 티켓에 열두 달짜리 카드 할부질도 해보는 것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따위는 잠시 접어두고 폭우가 쏟아지는 숲길을 우산도 없이 걸어서 흠뻑 젖어보기도 하는 것이다. 호랑이해라고 하니 그 비슷한 걸 저질러보자면서 새해를 맞긴 했는데, 여전히 일상에서 한두 걸음조차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채 벌써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송준호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한국어교육원장과 국제교류센터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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