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4일 전북대 학생 700여명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동학농민운동·항일운동 이념 승계⋯전국 유일 전북일보 보도
62년 전인 1960년 4월 3일. 전북대학교 정치학과 3학년 전대열 씨(82)는 이승만과 이기붕, 자유당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대해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시위를 계획했다. 자신과 함께할 학우들을 모았다. 전국의 대학교는 4월 학기를 시작해야 했다. 이승만 정권이 학생들이 3‧15부정선거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봄방학을 3월까지 연장해서다. 하지만 전북대에선 저항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 씨와 뜻을 함께 하기로한 10여명은 3‧15부정선거를 비판하는 민주선언문을 작성했다. 전북이 동학혁명의 발상지라는 사실과 3·1만세운동과 6·10만세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운동 등 선열들의 뒤를 이어 궐기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들은 개강일인 4월 4일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당시 전북대는 5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 씨 등은 하루 앞선 3일 모든 강의실 칠판에 ‘학생들은 살아있다. 젊은이는 살아있다. 3·15부정선거 규탄한다. 10시에 종치면 전부 종대 앞으로 모여라’라는 내용의 글귀를 써놓았다. 그렇게 다음날인 4월 4일 오전 10시. 전 씨가 상대 앞 커다란 종대의 종을 연달아 난타하자 모든 단대 건물에서 700여 명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전 씨는 미리 준비한 민주선언문을 그 곳에서 배포하고 외쳤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세대교체 이룩하자!”
700여 명의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정문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이미 정문 앞에는 경찰들이 학교를 봉쇄하고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전주 시내에 도달해 군중시위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경찰의 봉쇄로 교내시위에 그쳤다. 이후 시위대 맨 앞에서 구호를 외치던 전 씨를 포함한 30여 명의 학생들이 전주경찰서(현 전주완산경찰서)에 구금됐다. 구금된 학생들은 3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고형곤 전북대 총장은 전주경찰서장에게 전화해 “학생들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다”며 학생들의 석방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날의 사건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북일보에 보도됐다.
‘전북대학교에서는 학년말 휴가를 마치고 등교한 학생들간에 학생 데모가 행해졌다가 경찰의 사건탐지로 좌절되었다. 이날 등교학생들은 등교를 하고 등교 후 정에모여 강의시간이 시작되기 전 수분동안 서성대고 일부 학생들이 정치구호를 외쳤다.(중략) 데모설을 재빨리 알아차린 경찰의 현지출동으로 제지되었다고 한다’(전북일보 1960년 4월 5일자 3면)
전북대 4‧4시위는 4‧19혁명의 시초이자 전국 최초의 대학가 시위였다. 잘 알려진 4‧18고려대 시위보다도 14일 앞선다. 전북일보의 보도는 당시 정치상황에 그 의미를 다 담지 못했지만 이 기록이 전국 최초의 대학가 시위를 증명했다. 또 동학농민운동과 항일운동 등의 이념을 이어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국가보훈처도 이를 근거로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건국포장을 줬다. 하지만 군중시위로 이어지지 못하고 교내시위에 그쳤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팔순의 나이에 서울에서 생활하는 전 씨는 전북일보와의 통화에서 “전북대 학생들의 시위는 4‧19혁명의 그 발판과 시초가 된 것이 분명하다”면서 “많은 이들이 이를 알고, 역사적 사건으로 더욱 알려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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