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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기포의 역사적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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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정윤성

고창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동학농민군의 전면적인 봉기가 이루어진 무장기포지(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을 선포한 집결지)를 찾아 나섰던 것은 30년 전이다. 전북일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기획한 특별취재 답사였다.

정읍 고부의 농민들이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선 것은 1894년 1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불씨를 당긴 고부봉기였다. 그러나 고부봉기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부 농민들은 전봉준의 지휘로 말목장터와 백산 등지를 옮겨다니면서도 끝내 해산을 거부했지만, 조병갑 후임인 박원명의 설득으로 대부분 농민이 해산한 것이 그 증거다. 안핵사 이용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봉기 참가자를 색출해 체포하고 집을 불태웠으며 가족을 학대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 시기, 쫓기는 신세가 된 전봉준과 농민군이 찾아든 곳이 무장이다. 당시 무장의 대접주는 손화중. 전봉준은 손화중을 설득하여 봉건적 수탈과 폐정을 혁신하기 위한 전면적인 봉기를 단행한다. 이른바 무장기포다.

무장기포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바탕이 되어 왔던 오지영의 <동학사>에 1월의 고부봉기와 3월의 무장기포가 잘못 기술되면서 동학농민혁명 전면 봉기가 고부에서 시작되었다고 이해되어왔기 때문이었다. 무장포고문에 날짜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 점도 무장기포설에 대한 오해를 부추기는 바탕이 됐다. 상황이 이러하니 무장 기포지의 정확한 공간이 밝혀지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해 답사에서 취재팀은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동안 기포 장소로 서로 다르게 알려져 있던 무장 구수(九水)와 당산(堂山)이 같은 지명이라는 사실이었다. 구수마을의 옛 지명이 당산이었지만 기존의 자료들이 구수마을과 당산을 각각 기록하면서 논란이 됐던 지명은 이후 연구자들의 고증과 연구가 더해지면서 정리됐다.

갑오년 3월 20일, 농민군은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봉기를 알리는 창의문을 선포한다.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로 시작하는 창의문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도 망하는 것’이라며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한다’고 결의를 다진다.

갑오년, 무장 구수마을에 집결한 농민군은 4천여 명. 부패와 봉건을 타파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바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농민군이 결의를 다졌던 무장기포지(구암리 590)가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이 됐다. 장소의 역사성과 함께 제자리를 잡게된 무장기포의 역사적 위상이 반갑다./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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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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