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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소환되는 기축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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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 전주 출신 정여립을 비롯해 호남의 엘리트 계층 1000여 명을 죽음으로 내몬 기축옥사의 주도자인 송강 정철이 43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됐다. 지난해 3월 개교한 전남지역 첫 공립대안학교인 송강고등학교 교명이 다름 아닌 정철의 호를 따서 작명했기 때문이다. 개교 당시부터 광산 이씨를 비롯해 나주 나씨, 문화 류씨, 고성 정씨, 전주 이씨, 창영 조씨 종친회 등에서 송강고 교명 사용을 강력 반대해왔다. 이들은 기축옥사를 주도한 정철로 인해 호남의 무수한 인재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한 역사를 감안하면 그의 호를 딴 교명 사용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주장을 펴왔다. 

소위 정여립 모반사건이라 하여 선조의 명으로 송강 정철이 위관(우의정) 직책을 맡아 처리한 기축옥사는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은 최대 옥사였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정여립은 과거 급제 후 예조좌랑과 수찬을 지냈지만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 와중에 선조의 미움을 사 낙향했다. 그는 양반과 노비 등 귀천을 따지지 않고 대동계를 조직해 매월 모임을 갖고 주식을 함께 하면서 무술도 연마했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전주부윤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이들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선조와 서인 측이 동인 세력을 견제할 구실로 정여립을 끼워 넣었다. 정여립은 천하는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을 주장하는 등 당시 왕권체제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인 사상을 펼쳐 선조와 서인의 타깃이 되고 말았다. 위관을 맡은 정철은 정여립과 관련된 동인 세력을 가혹하게 처결했다. 호남의 명문가인 광산 이씨 문중의 이발은 당시 동인의 지도자로서 본인은 물론 노모와 어린 자식 등 일가족이 멸문지화를 겪었고 정여립과 교분이 있거나 서신만 주고받았어도 역모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이라 하여 과거 급제에서 제외되고 조정에 중용되지 못하는 등 출셋길이 막히게 됐다.     

송강고 교명 논란과 관련 학교 측은 개명 작업을 추진해 솔가람고로 바꾸는 안을 놓고 어제 공청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광산 이씨 등 7개 단체에선 송강을 우리말로 풀어쓴 속임수 개명이라며 반대함에 따라 정철을 둘러싼 역사 논쟁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송강 정철은 오늘날 정치인보다는 문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그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뛰어난 작품으로 우리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기축옥사로 인해 정치적으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인사유명(人死留名)이지만 어떤 이름으로 남겨지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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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 #역사 논쟁 #정여립 모반사건
권순택 kwonst@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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