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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탄생 400주년과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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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정윤성

올해는 반계 유형원(1622-1673) 탄생 400주년이 되는 해다. 실학의 비조(鼻祖)로 알려진 반계는 그 업적에 비해 저평가된 감이 없지 않다. 올해의 끝자락에 부안과 서울에서 꽤 규모가 큰 '반계 류형원 선생 탄신 4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려 그나마 다행이다. 15-17일 고려대와 부안에서 가진 '동아시아 실학 국제학술회의'와 '영호남 지역교류 문화행사'가 그것이다. 특히 지역교류행사로 '퇴계학과 반계학의 만남'이라는 주제가 눈길을 끌었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과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 실학자가 만난다는 것 자체가 무척 흥미롭다.

이에 앞서 지난달 11-12일 부안에서 '전북지역 유학과 유학자'를 주제로 제2회 전북학대회가 열렸다. 첫날은 광주전남의 한국학호남진흥원과 전북의 전라유학진흥원간 통합을 둘러싸고 전남북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뜨거웠다. 이어 다음날 반계유적 답사가 있었다. 예전에 잠깐 반계서당을 들렀으나 이번에 제대로 볼 수 있으리라 기대가 컸다. 반계는 32세 때인 1653년 겨울, 가솔들을 이끌고 이곳에 내려와 운명하던 때까지 20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안내는 예원예술대 이동희 교수가 맡았다.

처음 들른 곳은 우반동(현 보안면 우동리) 반계서당으로, 반계는 산중턱에 자립잡은 이곳에서 '반계수록'을 집대성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지금 건물은 1981년 복원된 것으로 건물 안과 밖에 반계가 팠다는 우물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앞이 탁 트여 우반동(인근에 선계폭포와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정사암이 있음)의 너른 들녁과 멀리 줄포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초빈이 나온다. 1673년 3월 운명하자 5월에 임시안장하고 장사를 지냈으나 10월에 반계의 유명에 따라 경기도 죽산(현 용인시 백암면)의 부친 묘소 아래로 옮겨 모셨다. 이곳 임시 안장터는 근래에 봉분을 만들고 안내문을 세웠다.

이어 한참 내려가 반계의 집터를 방문했다. 길가에 반계가 팠다는 우물이 있고 안내비가 세워져 있다. 이 우물을 지나면 반계집터라고 하여 공원이 조성돼 있다. 하지만 본래 집터는 이곳이 아니라 그 앞 논자리라고 한다. 이 논 가운데 돌기둥이 서 있는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는 곳이다. 반계집터는 경지정리로 후원의 대나무 밭까지 밀어버려 지금은 100여 평만 남아있다.  또 반계서당에서 8km 떨어진 상서면에는 반계를 배향했던 동림서원지가 있으나 1868년 훼철돼 지금은 유허비와 주초돌만 남았다. 이밖에 동진과 상서에 반계농장이 있었다고 하며 광주 풍양정에 반계의 유일한 글씨가 편액으로 남아 있다. 부안군이 보물같은 문화자원을 제대로 보존·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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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 #유적
조상진 cho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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