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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금요수필]느티나무와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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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영

수더분한 향기가 난다. 느티나무밭에서 웬 향기? 전주에서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하우스들이 많이 몰려있다. 우리는 퇴직 후 농부를 꿈꾼 적이 없었다. 하우스 구경하다 동네 사람의 입담에 못 이겨 작은 토지를 마련하여 밭을 만들고 토지주가 된 날부터 논농사를 짓게 되었다.

바로 옆엔 느티나무가 한 그루가 있어 그 그늘에 앉아있는 날이 많았다. 넓은 밭에는 참새떼와 까치, 그리고 산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한 우거진 숲이 되었다. 쏟아지는 나무 향기를 맡으며 시간을 보냈던 나의 유일한 휴식 공간이었다. 겨우내 이파리들이 떨어지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쓸며 귀찮은 날이 많아졌다. 하얀 냉이꽃과 수선화가 필 무렵 여기저기에서 새 잎을 피우기 위한 생명의 지저귐이 시작되었다. 아 비로소 봄이 오나 보다.

그런데 갑자기 기계 소리가 나더니 느티나무 하나가 잘려지기 시작하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였다. 나무로 태어나 멋진 수행도 잡아보지 못하고 이렇게 생명을 다하다니 이건 사건이었다.

작년 논농사는 느티나무숲 속에 사는 참새떼로 인하여 생산량이 적게 나왔다. 적당히 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삽시간에 의미 없는 나무가 될 줄은 몰랐다. 나무들이 베어진 그날 밤, 바람은 계속 불어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무가 베어지고 바람은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 얼마 전 KBS 라디오 여성시대 사연 중 남편 나무가 소개된 글을 읽었다. 내용은 어느 날 남편이라는 나무가 아내 옆에 생겼다. 바람도 막아주고 그늘도 만들어주니 언제나 함께하고 싶었지만, 차츰 싫어졌다. 그 나무 때문에 시야가 가리고 늘 돌봐줘야 하므로, 자기 시간을 너무 빼앗겼다. 또한 하고 싶은 일을 못 할 때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그런 나무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귀찮고 힘들게 하는 나무가 밉기까지 했다. 그래서 괜한 심술을 부리기도 했는데 어느 날부터 나무가 시들시들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 후 태풍과 함께 찾아온 거센 비바람에 나무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다음 날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나무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들켰던 아내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쓰러져버린 나무가 아내에겐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았다. 남편 나무와 다를 바 없는 나의 느티나무였다. 그늘로 인하여 농작물 피해를 주었던 일, 이제 뜨거운 여름날이면 어디에 몸을 부릴까? 나를 위로해주던 새 떼들의 합창,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와 강아지들, 고라니, 노루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사과를 다 먹어 치워도 밉지 않았던 까치 떼, 내가 덜 먹어도 될 쌀이었는데, 올가을부터는 낙엽 쓸 시간에 무얼 할까? 농막에 있다가 아파트로 오는 날이면 새들의 먹거리까지 챙겨주었는데 그 즐거움을 어디서 찾을까?

여린 이파리들이 마른 가지를 찢고 생명의 향기를 한 상 가득 차려놓았는데 난, 무슨 염치로 너희들과 이별하지? 흙냄새, 풀 냄새, 나무 냄새, 그리고 너희들이 조잘대는 소리를 한꺼번에 도둑맞은 기분이다. 봄이 칭얼대면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했던 나의 7년이란 세월을 누가 보상해줄까? 있을 때 잘할 걸 그랬다.

그늘져서 농사가 안되고 새 떼 때문에 피해 봤다고 늘 그랬는데 나무가 베어지니 큰바람이 부는 날이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무야 미안해! 속으론 많이 사랑했단다.

아직도 잔가지가 누워있는 그 자리에서 가공하지 않은 수더분한 향기가 난다. 나무 냄새 가득한 그 자리에 봄까치꽃이 활짝 피어 나를 다독거려준다.

 

△안영 수필가는 ‘문예사조’로 등단해 수필집 ‘내 안에 숨겨진 바다’와 시집 1권을 발간했다. 샘동인문학회장과 전주문협부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감사, 전북문인협회 이사 등으로 활약하며 ‘전주 문맥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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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안영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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