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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과 노인회장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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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이 언제 생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문헌상 고려 때 결성된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나 조선시대 기로소(耆老所)를 효시로 잡기도 하나 이들 모임이나 노인 여가시설은 오늘날의 경로당과 많이 달랐다. 1203년 결성된 해동기로회는 은퇴한 일부 관료들이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모여 시문을 짓고 술, 거문고, 바둑 등을 통해 노년생활을 즐기는 사적인 네트워크였다. 또 기로소는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국가에서 설치했고 기로연을 베풀었다. 서민들을 위한 연회로는 양로연(養老宴)이 있었다. 이들 기로연이나 양로연은 국가 차원에서 베푼 것이다.

민간에서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양로당(노인정)과 사랑방이 경로시설로 운영되었다. 이중 사랑방은 오늘날 마을회관이나 경로당 같은 역할을 했다. 대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제공하던 비교적 개방된 공간이었다. 이처럼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랑방은 일제의 강압, 광복과 사회적 혼란, 6·25 전쟁의 참화 등 격동기를 거치며 급속히 사라졌다. 특히 6·25 전쟁은 많은 가옥을 대거 파괴시켰다. 이로 인해 도시 주변은 피난민들이 모인 판자촌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사랑방을 기대할 수 없었다. 도시 노인들은 복덕방 주변이나 가로수 그늘진 곳, 공원 등지를 여가활동 장소로 활용했다. 이 틈을 비집고 한때 다방이 등장해 번창했지만 호주머니가 가벼운 노인들에게는 접근이 쉽지 않았다.

이후 도시 주변에는 판잣집 형태의 무허가 경로당이 부쩍 늘어났다. 이는 국회의원 선거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표를 의식한 국회의원 출마자들이, 노인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았고 선심 공세로 경로당을 지어주는 일이 유행일 정도였다. 이때부터 경로당이 오랫동안 노인들의 공간으로 기능해 온 사랑방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전주 등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경로당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 경로당은 상호 친목 또는 시설의 자치운영을 위해 회장단을 선출했다. 하나의 노인단체로서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1969년에는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대한노인회로 출범했다. 

경로당을 존립 근거로 하는 대한노인회는 현재 중앙회와 16개 시도연합회, 20개 해외지부, 244개 시군구지회로 조직돼 있다. 전국에 6만8828개에 이르는 경로당이 실핏줄처럼 퍼져 있고 회원이 300만명을 웃돌고 있다. 전북에는 6889개의 경로당에 회원이 20만명 가량이다.

하지만 조직과 권한이 커지면서 중앙회장을 비롯해 연합회장, 시군구 회장 등 선거에 따른 잡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26일 실시된 전주시 노인회장 선거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보자의 경력 논란과 함께 매달 분회장 및 경로당 회장에게 일정액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투표권자들에게 발송한 것이다. 또한 현직 시의원이 선거운동을 도와주다 상대편에 사과하기도 했다. 노인회장은 황혼의 권력 또는 경로당 권력이라고 불린다. 높아진 위상만큼 존경받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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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 #노인회장 #선거
조상진 cho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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