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가 지역을 기억하게 하고, 그 기억이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는 굴뚝 없는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수 있다. ‘로마의 휴일’의 이탈리아 스페인광장과 ‘반지의 제왕’의 뉴질랜드는 영화촬영지 하나로 도시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그 여운들이 지역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영상산업 자체가 지역의 풍경을 문화로 전환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007년 부안군에서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정우성, 송강호, 이병헌 주연) 촬영이 8개월간 진행되었을 때 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기생충 제작사)가 집계한 지역 사용 예산만 18억가량 되었다. 숙박, 식음료, 운송, 소품 등을 대부분 현지에서 쓰이며 부안지역 소상공인들의 즐거운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영화 한편이 지역경제에 미친 파급력을 보여준 사례다.
전북특별자치도에서는 이 흐름을 캐치하여 영상산업을 전략적으로 키워왔었다.
2001년 설립한 (사)전주영상위원회는 전국 최초의 지역 영상위원회로 최근 4년(2021~2024)간 촬영유치 374편, 영상물 제작지원 120여 편, 전문인력 양성 87명이라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전북을 주제로 한 로케이션 관광 활성화 영상 6편을 제작하여 ‘영화에서 관광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면서 전북지역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용인, 문경, 대전 등에서 대규모 첨단 세트장들을 잇달아 세우며, ‘촬영하기 좋은 도시’에서 ‘제작하기 좋은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반면 전북의 세트장들은 여전히 비가 오면 소음으로 인한 녹음이 쉽지 않고, 공간과 건물이 노후화되어 제작 여건이 뒤처지고 있다. 대전의 스튜디오 큐브처럼 완벽한 방음과 배수 시설을 갖춘 곳, 문경의 버추얼 스튜디오처럼 LED월과 인카메라 VFX기술로 현실과 가상을 자유롭게 오가는 환경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많다.
최근 박보검, 김남길 주연의 <몽유도원도>가 크랭크인하면서, 제작진은 붉은 노을 장면을 담기 위해 여러 차례 부안을 찾았다. 석양이 바다 위로 떨어지는 순간의 빛과 색을 담기 위해 날짜와 시간 등을 고려한 촬영 포인트를 물색 중이다. 그만큼 부안의 해안 풍경은 한국 영화가 표현하려는 서정미를 가장 잘 담아 낼 수 있는 배경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흐름 속에 전북 부안군의 변화는 매우 고무적이다. 영상제작자 지원을 위한 조례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며, 제작비 보조와 촬영 인센티브 제도를 현실화 시킬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조치가 아닌 로컬이 직접 문화산업의 주체로 나서려는 신호로 보인다.
이제 전북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촬영지의 양적 확장과 디지털화보단 기존 인프라의 질적 개선이 우선이다. 세트장을 리모델링하고, 경상북도 문경시처럼 지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보조출연자 아카데미나 영상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여 고용과 산업을 함께 성장시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전북특별자치도만의 자연과 아날로그 감성을 살린 스토리텔링으로 AI와 첨단화 중심의 수도권과는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영화는 기술이 입혀진 예술이자 굴뚝 없는 산업이다. 스크린은 닫혀도 이야기는 남고, 그 이야기가 피어나는 곳이 새로운 문화경제의 출발점이다. 한 장면의 여운이 한 지역의 경제를 움직이고, 한편의 스토리가 공장 몇 개의 역할을 대신하며,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전북이 지향해야 할 지속 가능한 제작 생태계다.
촬영(지역경제 활성화) → 관광(소비) → 고용(일자리)으로 이어지는 문화예술경제의 선순환 구조, 그것이 전북이 만들어야 할 영화의 다음 장면이다.
김수일 전북도립국악원 공연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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