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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대사습대회 전국대회 개최

국악 분야 최고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가 2주동안 펼쳐진다. 전주시와 전주대사습놀이조직위원회는 오는 15일부터 31일까지 국립무형유산원, 전주대사습청, 전주덕진예술회관 등에서 제47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와 제39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전국대회 본선경연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올해 전주대사습놀이는 무용 일반, 판소리 명창, 민요 신인, 무용 신인, 기악, 판소리 신인, 고법 신인, 판소리 일반, 무용 명인, 가야금 병창, 민요, 시조, 농악 등 13개 분야로 나눠서 치러진다. 대회 예선경연은 코로나 19확산방지를 차원에서 장소를 분산해서 치러진다. 학생 전국대회 예선은 15일부터 29일까지, 전국대회 예선은 15일부터 30일까지 전주대사습청,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 국립무형유산원 야외극장, 전주덕진예술회관 등에서 열린다. 본선의 경우, 학생전국대회는 30일 국립무형유산원 대공연장에서 하룻 동안 치러진다. 전국대회는 26일 국립무형유산원 대공연장, 28일 전주대사습청, 31일 국립무형유산원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조직위원회 등은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판소리 명창부의 장원에게 대통령상과 함께 상금 6000만원을 수여할 예정이다. 특히 경연심사 과정에서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에 심혈을 기울일 방침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13 18:56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실장의 전통문화 바라보기] 대사산이 그리고 꿀빵

대사산이 정영만 망망한 남해 바다 위. 휘날리는 신장대를 품고 저 멀리 파도를 가르며 지나는 웅비의 어선 행렬. 뿌려지는 어망. 날아드는 기러기 떼. 그곳은 천혜 한려수도이자 남해의 진주.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이다. 통영시의 옛 명칭은 충무였다. 오랜 시간 충무라 부르며 다니던 필자로서는 맛도 이름도 변하지 않는 통영의 향토 음식 충무 김밥처럼 왠지 충무라는 옛 명칭이 더 정겹고 맛있는 사심(私心)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시호를 도시 이름으로 썼던 통영은 다도해를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충청, 전라, 경상 삼도 수군을 통할하던 통제영이 상주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통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러한 지리적 요건과 기묘한 전술을 이용한 한산대첩으로 왜군을 크게 물리쳐 우리 선조들의 꿋꿋한 용맹과 패기를 널리 알리는 고장이었다. 또한 한국 저명한 예인들의 고향으로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등을 낳았으니 통영이야말로 예향의 보배스런 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해안 별신굿은 경상남도 거제도와 이곳 통영 일대 어촌 마을에서 행해지는 제의이다. 1987년 7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로 지정되어 11대 세습무 정영만 대사산이(굿판의 유지와 장식 및 굿 음식 장만 등을 책임지며, 승방<굿을 주재하는 무당>을 가르치는 사람)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남해안 별신굿은 여느 별신굿처럼 마을의 평안과 풍농풍어를 기원하며 축원한다. 이러한 해원(解寃)에 화룡점정을 찍듯 무가와 무악은 굿판의 중요한 요소이자 빠질 수 없는 점정이다. 남해안 별신굿의 무가와 무악은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는 동해안 별신굿, 전라도의 씻김굿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특이한 선율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산을 오르며 흥얼거리는 듯한 동해안 별신굿의 메나리 토리도 아니요, 슬프고 애절한 전라도 씻김굿의 육자배기 토리만도 아니다. 경상도의 메나리는 울진, 포항, 부산, 거제 등 경상도 전역을 토대로 통영에 왔으며 전라도의 육자배기는 전주, 남원, 진도, 해남, 순천, 여수 등 전라도 전역을 거쳐 통영에 도달했다. 이렇듯 영호남 접경지인 통영에서 행해지는 남해안 별신굿은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두 지역의 굿 음악 토리가 혼합되면서 독특하고 창의적인 선율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듯 통영의 별신굿 속에는 다른 지역의 굿과 비교해 특별함이 많다. 특별함 중에 또 하나의 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먹을거리다. 여느 지역의 굿처럼 화려하고 풍성한 상차림은 물론이고, 굿 연희 중 필자와 같은 산이(남해안 별신굿의 악사를 칭하는 말)들이 먹었던 주전부리는 통영 꿀빵이었다. 이 꿀빵은 굿의 진행 과정 중 쉬는 틈을 타서 별신굿의 산이들이 먹었던 통영의 향토 음식으로 개인적으로 빵을 좋아하던 필자에게는 굿과 주전부리였던 꿀빵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 통영의 꿀빵은 충무 김밥과 더불어 통영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이 되었다. 지금도 유명한 통영의 중앙시장과 통영 지역 여러 곳에서 꿀빵이 다양한 종류로 판매되고 있는데, 필자가 별신굿을 배우러 왔던 1990년대에는 그 종류와 판매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통영의 꿀빵. 잔잔한 달콤함을 입에 물고 아쟁 활대를 그을 때에는 이미 소리 속엔 희락(喜樂)이 있었다. 이렇듯 꿀빵은 남해안 별신굿과 함께 달콤함과 즐거움으로 그렇게 필자에게 다가왔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5.13 18:52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아동화에 대하여 ④

또 당연하다는 듯이 너는 나를 닮아 그림에 소질이 없나보다.고 한다. 그 아이는 나중 미술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나 반복적으로 돌아 오는 미술 시간에 뭔가를 그려야 하는데 자꾸 위축되기 마련이다. 나중에는 손바닥이나 도화지의 일부분으로 가리고 그림을 그린다. 거기다가 선생님이 아이의 자신감을 회복해준다고 옆에 가서 잘한다거나 무슨 충고를 하면 더 위축되어 미술시간이 생지옥 같아진다. 이런 아이들은 공동작업을 시켜서 자연스럽게 자신감을 회복시켜야 한다. 한 화면에 4~5명을 투입하고 문제의 아이는 상대적으로 쉬우나 넓은 면적을 하게 하여 공동으로 성취감을 느끼게 해야 한다. 우리 아이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려요. 색칠공부를 사다 주면 선 밖으로 절대 색상이 나가지 않게 칠하거든요. 울화를 유발시키는 뻔뻔함이다. 이건 사람을 순응화시키려는 식민 교육 사상이다. 자유롭게 그린 그림, 정확한 해설이 정답이다. 소풍을 다녀와서 소풍을 주제로 그리게 하는 것보다 소풍가기 전에 소풍을 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리게 하는 것, 시장을 주제로 예고없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보다는 미리 예고하고 시장에 들려보고 나서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은 또 어떤가? 서양에서 미술을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이 이를 기술이라 여겨 맨 먼저 공대에 미술과를 두었던 것까지 일제를 닮았다는 것이 서럽지 않은가? 프뢰벨(Friedrich Wilhelm August Frobel, 1782~1852)에 의하면 6세까지가 유아기이다. 이 시기의 아동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칭찬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지는 잘 몰라도 우리의 아이들을 춤추게 한다. 그렇게 그리면 안 된다거나 살에는 살색을 칠해야 하고 몸에서 팔의 비례는 어떻다는 등의 발언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런 주문은 상상력을 배제하고 개념화만 만들뿐이다. 성인의 잣대로 아이들의 그림을 잴 수는 없다. 어린이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엄마를 보지도 않고 엄마를 그리다가 차츰 엄마를 바라보는 횟수가 늘어날 것이다. 유아일수록 마음속에 이미 그려진 모습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5.10 18:00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세 뒤집은 이치전투

웅치전투(진안과 전주 경계)에 이어 금산과 전주의 경계지역에서는 전라도를 다시 침공하려던 왜군과 조선관군의병 사이에 2차전이 벌어졌다. 바로 이치전투이다. 이 전투는 조선에 불리하던 전세를 역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승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라도에서 군량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해, 한반도 북쪽까지 뻗친 전선을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전라도 남부에 있는 조선 수군의 거점까지 사수해 이후 벌어진 해상전에서 우위에 점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했다. 당대 문헌사료에서도 왜군들이 이치전투를 조선 3대 전투 가운데 첫 번째로 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치전투 이후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지 않은 관계로, 임란극복에 있어서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웅치안덕원 전투 이후 전라도 상황과 이치전투 전개과정, 당대의 평가, 전투가 임진왜란사에서 가지는 의의 등을 재조명한다. 1592년 7월 8일 웅치전투가 끝난 뒤, 왜군은 금산성에 머무르며 인근지역을 노략질하면서 여전히 전라도를 위협했다. 특히 7월 20일에는 진산에 침입해 관사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에 전라도 관군은 대대적인 전투 준비를 했다. 전라감사 이광은 웅치전투 당시 남원을 지키던 전라도절제사 권율에게 관군 1500명을 이끌고 이치로 가서 주둔케 했다. 당시 안덕원에서 적을 격퇴한 황진도 소식을 듣고 이치에 가서 진을 치고, 휘하 장수인 공시억위대기, 의병장 황박과 함께 전투에 대비했다. 전북대 사학과 하태규 교수는 통상 웅치전투와 이치전투가 7월 8일 같은 날에 전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그러나 <선조수정실록>, <난중잡록>, <이치주첩서>, <쇄미록>등 문헌사료를 보면서 웅치전투 이후의 전황을 분석하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치전투는 8월 17일께 발발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남원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편찬한 <연려실기술>, 관찬사서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웅치전투가 끝나고 금산성에 머물던 왜군 6번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는 1592년 군을 이끌고 이치를 향해 공격해 왔다. 동복현감 황진은 공시억위대기황박과 함께 제일선에서 부대를 맞아 대접전을 벌였다. 전투 중 황진은 적의 조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이에 사기가 오른 왜군은 진채(陣寨)로 뛰어들었다. 공시억위대기황박은 이런 사태에 필사적으로 방어했고, 이 때 전라도절제사 권율이 장수를 독려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치고 나갔다. 황진도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웠다. 결국 왜군은 크게 패해 무기를 다 버리고 달아났다. 다만 황박은 이 전투에서 순절했다. 관찬사서 <선조수정실록>은 이치전투의 성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웅치안덕원 전투에 이어 이치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둬, 이후 왜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침공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차단해서다. 당시 왜군은 이치전투에서 금산성으로 물러났다. 이 때 충청도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 승병은 이들을 공격했으나 패했다. 그러나 왜군은 이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전투 직후 전라도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를 기회로 전라도 관군은 금산성에 머무는 왜군을 간헐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9월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전황이 불리해진 일본군은 경상도, 성주, 개령 반면으로 철수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25년 7월 1일 기사에서는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고 나와 있다. 33권 도원수 권율의 졸기(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서는 이치의 승리와 행주의 대첩은 비록 옛날 명장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하겠는가. 국가가 중흥의 업을 이룬 것은 실로 이에 힘입은 것이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이치전투를 전세를 뒤집은 전투로 평가한다. 육상 승전을 계기로 수군이 재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데다, 호남에서 군량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 전략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하태규 교수는 전쟁이 장기전에 접어들자, 왜군은 전라도에서 부족한 군량과 물자를 조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며 그러나 웅치이치 전투로 인해 전라도 점령이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왜군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전선의 보급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면서 결국 평양과 함경도까지 뻗쳐있던 전선을 경상도 지역으로 축소했다.고 부연했다. 국방대학교 노영구 군사전략학과 교수는 왜군을 금산에 붙잡아 조선 수군의 거점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저지한 효과도 있었다며 이는 조선이 해상전에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만약 왜군이 계획대로 전라도를 점령해 식량조달과 부대관리를 원할하게 했다면 조선 전역이 위기에 처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치전 주역 동복현감 황진 황희 정승(1431~1449)의 5세손인 황진은 1550년 남원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장수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에 임명됐으며, 1583년 여진족 3만 여 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한 이탕개(泥湯介)의 난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이후 황윤길김성일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함께 했는데, 다녀온 뒤 일본의 침공을 예견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일본에 다녀와 왜변이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일 공무가 끝나면 곧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고 나와 있다. 1591년 동복현감으로 임명됐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을 맞았다. 당시 황진은 안덕원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권율과 함께 웅치전투의 주역이 됐다. 황진의 활약상과 평가는 사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려실기술>과 <선조수정실록>은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해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종일토록 교전해 적병을 대파했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고 기록했다. 1593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고, 백성과 함께 토산을 쌓아 적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격퇴한 성벽 밖의 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이 쏜 총에 이마를 맞아 전사했다. 당시 황진의 전사소식을 들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했다. 사후, 조정에서는 좌찬성에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진주의 창렬사, 남원의 정충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무민이다. 노영구 교수는 황진 장군은 공훈을 보면 역사적으로 크게 평가받아도 손색이 없다며 그러나 임진왜란의 많은 영웅들이 쓰러지던 1593년 4월~6월에 유명을 달리해 업적이 묻힌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5.06 17:53

중세 유럽 앤티크(고가구) 한눈에

중세 유럽의 최고급 탁자에 앉아 차 한잔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앤티크(고가구) 카페가 남원에 문을 열었다. 지난 달 30일 남원시내에서 차로 5분 거리인 남원시 모정길 7-4에 문을 연모정 앤티크 카페가 그 주인공. 지상 2층 규모로 만들어진 이 카페는 모두 중세 유럽의 고가구들로 실내가 장식됐다. 수백만원씩 하는 탁자와 의자, 서랍장, 찻잔 1000여점이 있다. 카페 안의 그림, 전등, 시계 등도 모두 중세 유럽 때 만들어진 것이다. 시가로 7억원어치가 넘는다. 평소 유럽 고가구에 관심이 많았던 오용섭 대표 부부가 십수년간 한점두점 사들인 작품들이다. 이 중에서 단연 최고의 작품은 17세기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피아노다. 건반 하나하나가 상아로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3~4대밖에 없을 정도로 희귀한 것이라고 한다. 카페 밖의 300평 남짓한 야외 정원도 유럽 앤티크와 수천만원을 넘는 제주 현무암 작품, 이태리 대리석으로 만든 분수 등으로 구성돼 한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자유롭게 야외 정원을 거닐며 작품과 여유, 차를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됐다. 모정 앤티크 카페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분재 작품들. 국내 각종 전시회에 출품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는 철쭉, 모과 등 총 200여점의 분재가 전시돼 있다. 비싼 것은 한점에 1000만원을 호가할 정도며 수준 높은 분재가 즐비하다. 오용섭 대표는야외 정원, 최고 수준의 분재 작품까지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앤티크 갤러리로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다며남원의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일반
  • 신기철
  • 2021.05.05 17:31

어린이날 전북 곳곳서 다채로운 문화 행사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를 위한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도내 곳곳에서 열린다. 국립무형유산원은 5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유산원 중정에서 세시풍속 체험 놀자! 놀자!를 무료로 운영한다. 전통놀이 강사들의 지도 아래 고리 던지기, 고무줄놀이, 굴렁쇠 굴리기, 비석 치기, 투호 등 다양한 전통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다. 전통놀이 꾸러미로 단청문양 바람개비 등도 만들어본다. 행사는 비가 오면 취소될 수 있다. 또 8일과 22일, 29일에는 얼쑤마루 공연장에서 어린이와 함께하는 가족공연을 총 4차례에 걸쳐 진행한다. 8일에는 어린이 연희극 아기돼지 삼형제(극단 연희공방 음마깽깽), 22일에는 어린이 연희극 연희는 방구왕(창작집단 깍두기), 29일에는 어린이 음악극 봉장취(극단 북새통)를 공연한다. 4세 이상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이라면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유산원 누리집과 전화로 사전 예약하면 된다. 한국전통문화전당은 5일 전주한옥마을 내 우리놀이터 마루달에서 우리놀이 이야기 콘서트를 연다. 행사는 첫째 마당, 둘째 마당으로 나눠 △우리놀이 이야기 보따리꾼(고누, 쌍륙, 저포, 화가투놀이) △우리놀이 이야기 할머니 △우리놀이 장터(풀각시, 장명루 마스크줄 만들기 체험) 등으로 구성했다. 첫째 마당은 사전 예약, 둘째 마당은 현장 접수로 진행한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5.03 17:52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아동화에 대하여 ③

이정우(6년 1개월)작 '괴물' 상당히 큰 규모의 어린이 사생대회에 심사를 간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지나가면서 마음을 정하고 되돌아오면서 낙선작부터 골라내는 것이 방법이다. 지나가면서 우주와 우주선을 그린 그림이 참 기능적이어서 눈에 띄었다. 그런데 계속 가다보니 구도만 조금 바꾸고 색감이나 형태가 같은 그림들이 여러 장 발견되었다. 돌아오면서 그 전부를 낙선으로 찍어 내렸다. 심사가 끝나고 나이 지긋한 여 선생님 한 분이 나한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고함의 내용인즉 중앙의 어느 신문사에서도 항상 얘네들은 특선인데 네가 미술을 아냐는 것이었다. 주최 측도 욕을 싸잡아 먹었다. 자격도 없는 나같은 것을 심사를 시켰다고. 정말 대단했다. 그 고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데. 어휴 그냥---. 기다렸다가 물었다. 선생님 우주여행을 아이들과 함께 좀 가시지. 출장비가 모자랐나 봐요 왜 선생님 혼자 다녀오셔서 우주는 이렇게 생겼더라고 주입식으로 강요하셨어요? 다음부터는 출장비 넉넉하게 신청해서 아이들과 같이 가보세요. 아이들도 저마다 느끼는 점이 다 다를 것인데요? 초등학교 3학년 선생님에게 허락을 구하고 교실에 들어섰다. 그 시간에는 풍경화를 한다고 지도 안에 적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조용히 나가서 본관 건물의 벽돌과 유리창을 만져보고 오게 하였다. 그리고 칠판에 거칠다를 쓰며 유리창은 거칠던가요? 아니요 이번에는 칠판에 매끄럽다를 쓰며 말하니 이구동성으로 매끄러워요 대답한다. 그 날의 풍경화 제목은 본관 건물 그리기였다. 자기들 스스로 거칠다와 매끄럽다를 외쳤으니 그 날의 고민은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머리에 쥐가 났을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그 두 개의 표현을 하지는 못했지만 거칠다와 매끄럽다는 말에 책임을 못한 것은 지금도 한이 될 것이다. 집에서 부모가 아무렇지도 않게 쟤는 누굴 닮아서 그림을 못 그리지?하며 웃는다. 그 웃음 속에는 못 그려도 괜찮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국, 영, 수, 과, 사와 같은 중요 과목이 아닌 여벌 과목이니 괜찮다 생각한다. 부모 모두 대졸일 것이다. 아니 요즘은 대학원 졸도 많을 것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5.03 17:52

비닐하우스·농막 거쳐…전주기접놀이전수관 준공

전주기접놀이보존회 임양원(94) 회장이 전주기접놀이를 위해 꼭 이루겠다던 세 가지가 있습니다. 대통령상 수상, 무형문화재 지정, 전수관 건립이죠. 이번 전주기접놀이전수관 준공으로 세 가지 모두가 실현됐습니다. 꿈만 같아요. 지역 대표 민속놀이인 전주기접놀이는 지난 2016년 제57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2018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됐다. 전주기접놀이전수관 준공까지 앞둔 전주기접놀이보존회 서치식 홍보담당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며 환히 웃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주기접놀이보존회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통문화가 흔들리던 1998년 창립해 비닐하우스 전수관과 농막 전수관을 전전하며 전승 활동을 이어왔다. 그러다 전주기접놀이 전승마을인 함대마을이 효천지구 택지 개발사업에 포함되면서 마을이 개발의 한 축으로 참여하게 됐다. 전수관 건립을 최초로 제안해 토지주 대표단, 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인가권자인 전주시가 수용하며 건립을 확정 지었다. 그렇게 세워진 전주기접놀이전수관이 30일 준공식을 개최한다. 전수관은 한옥 4개동과 양옥 1개동(공연동)을 갖췄다. 향후 보존회는 전수관 시설 일체를 시에 기부채납할 예정이다. 정식 개관은 관련 행정 절차가 마무리된 오는 7월께 가능할 전망이다. 정식 개관 전, 5월 한 달간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명인 초청 공연을 이어간다. 한편 준공식은 코로나19 상황을 감안, 최소한의 인원만 참석한 가운데 치를 예정이다. 대신 전주기접놀이보존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 현장을 생중계한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4.29 18:10

‘이건희 컬렉션’ 전북에도(?)… 아쉽지만 ‘無’

하루종일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 소장품,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다.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컬렉션의 실체가 공개되고, 공식적으로 기부 의사까지 밝히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삼성은 28일 사회 환원 계획을 발표하면서 국보 등 지정문화재가 다수 포함된 고미술품과 세계적 서양화 작품, 국내 유명 작가 근대미술품 등 1만1000여 건(2만3000여 점)을 국립기관 등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기부 목록 대부분은 고미술과 근대미술로, 로스코 등 서양 현대미술품 대부분은 삼성미술관 리움으로 가는 것으로 정리됐다. 특히, 한국 근대 미술에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작품 중 일부는 지역에 기증한다. 대구미술관에는 이인성이쾌대 등의 대표작이, 전남도립미술관에는 김환기허백련오지호 등 호남 지역 작가들의 작품, 제주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은 이중섭의 작품, 강원 양구 박수근미술관에는 박수근의 작품을 기증하기로 했다. 이처럼 소장품 일부가 지역 미술관에도 기증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각에서는 우리 전북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 건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이 전북 문화계의 전언이다. 의아하다는 질문에 대해 지역 문화계에서는 아쉽지만 전북은 연결 지을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전북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문화의 고장이라는 이름과 달리 전북지역의 경우 공립미술관인 전북도립미술관조차 변변한 컬렉션을 갖추지 못했고, 이번에 기증을 받은 곳도, 기존에 관련한 컬렉션을 갖춘 미술관들이다. 그런 맥락에서 전북은 당초부터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 실제 이번에 작품을 기증받는 광주나 전남, 대구의 미술관은 지속적으로 수준 높은 컬렉션 기반을 다져왔고, 지자체 차원에서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 전시 등을 통해 지역문화를 육성해 온 곳이라는 평가다. 지역 문화계 관계자는 전북도립미술관은 전국 14개 공립 미술관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하다는 것이 문화계 전반의 인식이다. 좋은 기회가 와도 객관적으로 볼 때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 문화일반
  • 천경석
  • 2021.04.28 18:53

한지 대중화 모색하는 제25회 전주한지문화축제

올해 열리는 전주한지문화축제는 한지의 대중화에 초점이 맞춰진다. 전주한지문화축제조직위원회(김선태 조직위원장, 인미애 총감독)는 28일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제25회 전주한지문화축제 주요 일정과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올 축제는 함께 한 지금, 한지로 맞들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오는 5월 5일~5월 7일 한국전통문화전당 일원에서 열린다. 세부 프로그램은 한지의 날한지스타일한지문화투게더로 구성된 한지마당,전국한지공예대전 수상작 등을 선보이는 전시, 전주한지패션대전국제심포학술포럼으로 꾸려진 행사 3개 분야다. 눈길을 끄는 분야는 한지마당이다. 이 기획은 사전접수로 모집한 가족 46팀(160여명)이 한지칠교놀이, 한지공예, 한지패션쇼를 개최하는 전주한지 가족캠프, 초등학생이 한지공예를 체험하는 집콕 공예교실, 전주한지 체험키트를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손품 한지체험등 대중친화적인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전시에서는 전국한지공예대전 수상작과 공예대전 초대작가의 작품, 한지미술공모전 수상작 76개 작품을 선보인다. 국제학술 심포지엄에서는 최성일 전주한지장이 전주 전통한지 제조방법, 누세텔리 이탈리아 ICPAL복원팀장이 전주한지 인증에 따른 실험분석 결과, 포나시아리 바티칸박물관 종이복원팀장이 바티칸박물관의 한지 활용 및 복원사례 및 계획을 발표한 뒤, 국내 한지전문가들과 전주한지의 역사성과 정체성, 발전방향을 두고 토론을 한다. 이와 함께 6월에 비대면으로 열리는 전주한지패션대전은 전주한지국제패션쇼 갈라쇼, 한지패션디자인경진대회, 어린이세계민속의상 한지패션쇼 등을 준비하고 있다. 인미애 총감독은 올 전주한지문화축제의 특징은 온라인 행사 운영, 자료의 디지털 데이터화, 사전모집을 통한 시민참여형 축제라고 할 수 있다며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은 만큼 축제를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추진하면서 온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김선태 조직위원장은 시민과 한지인 모두 전주의 대표적인 전통자원인 한지의 멋과 가치를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4.28 17:52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5) 분단 극복과 통일을 노래한 시인 박봉우

박봉우 시인과 책 <휴전선>, <사월의 화요일>. 시인은 1934년 7월 14일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승주 군수를 지낸 아버지 박병모와 어머니 김효정 사이에서 3남 2녀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 시인의 학창시절은 광주를 배경으로 한다. 광주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과 광주고등학교, 전남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휴전선」이 당선된 후 서울 생활을 거쳐 전주로 내려와 살다가 1990년 3월 1일에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혹자는 박봉우 시인은 전남, 광주 사람인데, 전북의 작고 문인으로 거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박봉우 시인은 이 고장 전주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우석대 문신 교수는 「절대 고독의 자유인, 전주에 귀의한 시인 박봉우」라는 논문에서 박봉우 시인은 전주에서 혹독한 피로 자신의 영혼을 물들였다라고 하면서 전주와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전주에 있을 때 시인은 그토록 갈망했던 분단 현실과 통일 조국, 군부 독재를 향한 반전(反戰), 반독재의 윤리가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며, 자신을 대신하여 남부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하면서 생계를 책임졌던 아내를 잃었고, 마지막에는 활화산보다도 더 뜨거운 심장으로 지키고자 했던 자신마저 잃어버렸다고 했다. 이 외에도 전주 문인들과의 추억, 그리고 젊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끼친 영향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을 놓칠 수 없다. 최명표 박사의 기념비적 명저 『전북 작가 열전』에서도 시인의 삶과 문학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고려하였다. 박봉우 시인의 삶은 크게 3기로 나누는데, 그것은 광주에서의 유소년기(1~23세), 서울에서의 청년기(23세~42세), 전주에서의 장년기(42세~57세)다. 어린 시절, 광주를 배경으로 한 학창시절에는 그는 문학의 신동(神童)으로 이름을 날렸다. 1952년에는 「석상(石像)의 노래」가 주간지 『문학예술』에 당선되었고, 또한 친구들과 4인 시집 『상록집』을 냈다. 23세 때인 1956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휴전선」이 당선된 후, 그의 서울 시대가 펼쳐진다. 천상병, 김관식, 신동문, 신동엽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그가 명동 거리에 나타나면 아르뛰르 랭보가 나타난 듯 요란했다고 한다. 4월 혁명 정신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서 왜곡되자 시인은 그때의 분통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4월의 피바람도 지난 수난의 도심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구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갈라진 가슴팍엔 살고 싶은 무기도 빼앗겨버렸구나 _「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의 일부 이 시절 박봉우는 기인으로 알려졌다. 항상 술에 취해 있었으며,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 전날, 한 술집에서 빨치산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취재차 내려간 지방에서 집단폭행을 당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정신병동에 격리되기도 했다. 그의 서울살이는 정신분열, 생활의 불능, 타인과의 불통이 겹치면서 매우 고달팠다. 1965년(32세)이 되어서야 6년 동안이나 미루어 온 결혼식을 탑골공원에서 했다. 이날 결혼식에는 장녀 나리와 장남 겨레가 특별 하객으로 함께 했다고 한다. 분단의 아픔에 괴로워하고 통일을 염원했던 시인은 독립선언의 역사적인 현장에서 결혼함으로써 시인의 시대정신을 드러냈다. 그가 전주로 오기까지에는 시인의 고교 동창이었던 당시 이효계 전주시장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박봉우 시인이 서울에서 매우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시장은 그를 전주시립도서관의 촉탁 직원으로 배려한 것이다. 시인은 1975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서울 하야식(下野式)」(1975)을 발표한 후 전주로 내려왔다. 끝나지 않았다 모두 발버둥치는 벌판에 풀잎은 돋아나고 오직 자유만 그리워했다 꽃을 꺾으며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난군(亂軍) 앞에 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 나는 떠나련다 서울을 떠나련다 -「서울 하야식(下野式)」의 일부 전주로 내려온 시인은 1990년 3월 1일, 57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전북의 문인들, 그리고 각 대학의 문학 지망생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소재호(현, 전북예총회장)는 「박봉우 시인의 전주에서의 삶, 그 흐린 하늘」에서 박봉우 시인은 하루를 술로 시작해서 술로 마쳤지만, 자기 시를 줄줄 외는 등 그의 기억력이 빼어나게 출중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천재성은 남을 포근하게 감싸면서도 그 어디에도 오만함은 없었지만, 다만 시에 대해서만은 혹독하리만치 비판의 서슬이 파랬다고 했다. 장교철(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은 자신의 시집 『황지의 풀잎』을 주면서 시인은 시대를 꿰뚫는 시대 정신을 가져야 한다라던 박봉우 시인을 기억했다. 한 번은 박봉우 시인과 함께 문인들의 회식 장소를 찾아갔는데, 시인의 꾀죄죄한 옷차림과 술 취한 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문전박대하자, 매곡교 부근 시인의 단칸 셋방으로 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했던 일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1990년 박봉우 시인의 장례식에서 자작 조시를 낭독한 백 학기(시인, 영화배우)는 민족분단의 비원을 가슴에 품고 통일의 의지를 노래했던 시인의 삶을 높이 평가하였다. 「박봉우 시 연구」라는 논문에서 시인의 시는 분단상황 인식과 그 극복 의지, 내밀화된 사랑의 풍경, 혁명과 민중적 세계관, 그리고 세상과 따뜻한 소통 그리고 화해 등이 잘 담겨 있다고 하였다. 시인이 돌아가신 지가 30년이 지났지만, 전주의 문인들은 박봉우 시인과 함께한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효자 공원묘지에서 영면에 들었지만, 평생 시인이 열망했던 꿈은 절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참고 : 문신 「절대고독의 자유인, 전주에 귀의한 박봉우 시인」, 백학기 「박봉우 시 연구」 (2000), 최명표 『전북작가열전』(2018)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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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7 18:07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상) 보물로 지정된 봉덕리 금동신발

사적 제531호 고창 봉덕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이 30일간의 공고기간을 거쳐 4월 21일 보물 제 2124호로 지정되었다. 완주 갈동유적의 세형동검 거푸집에 뒤이어 봉덕리 마한분구묘 유적에 출토된 금동신발이 보물로 지정됨에 따라 전북지역의 마한 문화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번 금동신발의 보물지정과 관련하여 필자는 2009년도 봉덕리 고분군 발굴 당시의 책임자로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그것은 지방자치단체의 열악한 재정을 무릅쓰고 지역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단체장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발굴이었기에 지면을 빌어 당시 군수님과 담당자들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실 봉덕리 1호분의 몇 개월에 걸친 발굴조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까지도 매장주체부로 축조된 석실들이 대부분 도굴된 상태여서 출토유물 역시 대부분이 토기 파편뿐이었다. 그나마 수습된 중국제 청자의 작은 파편에서 조사단은 학술적 위안을 삼아야 했을 지경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발굴조사가 마무리될 무렵에 분구의 동남 모서리 근처에서 도굴의 피해를 당하지 않은 석실 1기가 발견되었다. 조사결과 이 석실은 수혈식으로 이미 확인되었던 횡혈식과는 다른 구조의 석실이었는데, 만일 이보다 규모가 월등한 횡혈식 석실이 도굴의 피해를 당하지 안했다면 얼마나 화려한 부장유물이 우리와 마주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안타까움을 넘어 고대사 복원의 진정한 사료를 무참히 짓밟아 버린 도굴의 만행에 분노마저 느끼게 했다. 마침내 석실 내부의 조사 일정을 정하고, 석실의 뚜껑돌을 들어올리기 전에 작은 틈새로 카메라로 촬영하여 내부를 살펴보니 부장된 유물들이 완전한 상태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피장자 발치쪽에서 한 켤레의 금동신발이 시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순간 우리 조사단에서 수습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문화재청에 긴급 지원 요청하여 3일에 걸친 작업 끝에 국내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의 금동신발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은제머리장식, 소호장식유공호 및 그릇받침, 장식대도, 청동제 탁잔, 화살통, 중국제 청자, 각종 토기류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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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7 18:00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아동화에 대하여 ②

생리 위생과 정신 위생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가 감기에 감염되면 정신없이 병원에 데리고 간다. 생리적 위생에 철저하다. 그러나 그런 부모들도 아이들의 정신 위생에는 무관심하다. 아이들 나름대로 불만과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그것을 해소하여 주지 못하면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아빠가 엄마에게 폭행을 할 때 바라보는 아이는 나름대로 평가를 하는데 힘이 없으니 응징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을 자발적으로 해소하여 주는 것이 그림이다. 특히 글을 아직 모르는 유아기에는 더욱 그렇다. 그림으로 옮겨지면 엄마를 크게 그리고 아빠의 손을 안 그리는 등으로 응징을 하여 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 힘으로 위축이 되는 친구와의 갈등도 친구와의 정이나 가족간의 정도 그런 식으로 표현하여 자기 세계를 구축해 간다. 화가를 시키기 위하여 미술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의 고른 발달을 위하여 미술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이의 꽃 그림을 보면 대개가 해바라기와 튤립이다. 꽃의 정면은 해바라기를 측면은 튤립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튤립만 그린다. 언제나 세련된 꽃을 그리지만 날이 갈수록 다른 꽃을 그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열등감을 느낀다. 그림을 거꾸로 그리는 아이도 있다. 엄마가 항상 자신의 앞으로 그림을 그려주니 반대편에서 바라 본 결과이다. 그림을 검정색으로만 그리는 아이도 있다. 엄마는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검정색 도화지를 주면 된다. 기억색(Memory Color)으로만 그리는 아이도 있다. 하늘은 하늘색, 땅은 땅색, 얼굴은 얼굴색으로만 그린다. 지금은 조각가로 꽤 알려진 아들이 초1때 학원과 학교의 커넥션으로 미술학원에 다닌 일이 있다. 마침 내가 미술학원에 간 날, 그 날의 주제는 아빠 그리기였다. 아들이 아빠 얼굴을 빨간색으로 그리는 것을 본 학원장이 얼굴을 왜 빨간색으로 하냐면서 친히 살색을 칠하라고 크레파스를 집어 주었다. 그 길로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 아이의 아빠는 맨날 술에 절어 얼굴이 붉은 색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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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2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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