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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불교 미술과 그 아픔
후백제 불교 미술과 그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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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12.0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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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장근 군산대 교수
백두대간과 금남정맥에 철통같은 방어체계를 구축했던 후백제가 갑자기 망했다. 후백제가 융성할 때 멸망해 한 줄의 역사 기록이 없고 후백제 문화유산도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가끔씩 후백제를 생각할 때마다 융성한자 반드시 망한다는 라는 역사의 교훈을 떠 올리게 한다. 최근에 군산 발산초등학교 내 석탑 및 석등이 후백제 때 만들어졌다는 논문이 발표되어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도내 곳곳 방치된 후백제 불상·석탑

후백제 도읍 전주에서 견훤이 태어난 문경시 가은읍으로 가는 길목에 완주 봉림사지가 있다. 본래 이곳에 있었던 석탑 및 석등이 일제강점기 군산으로 옮겨졌다. 군산지역 농장주였던 시마따니가 자신의 농장으로 석탑을 옮겼는데, 그것이 바로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이다. 안타깝게 탑신의 한 층이 통째로 없어지고 4층만 남았지만 간결한 아름다움과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그렇지만 석탑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우리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금이 가고 깨진 부분이 적지 않다.

완주 봉림사지의 아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1층에 완주 봉림사지 삼존불상이 잘 모셔져 있다. 1977년 완주 삼기초등학교 뒤뜰에 있었던 것을 옮겼다고 한다. 대좌와 광배를 갖춘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협시불이 모셔진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걸작이다. 그런데 본존불과 협시불은 모두 머리가 없고 광배와 대좌도 큰 상처를 입었다. 불자들의 신앙의 대상이자 중심인 불상과 석탑이 무슨 이유로 훼손됐을까?

후백제의 동쪽 거점이었던 장수군에도 버려진 석탑이 있다. 일명 개안사지로 불리는 밭을 경작하는 과정에 우연히 땅 속에서 나온 것들로 당시 웅장했던 사찰의 존재를 암시해 준다. 오늘도 장수군 장계면 삼봉리 탑동마을 모정 부근에서 사람들이 찾아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장수군에는 영취산을 중심으로 법화산과 백화산, 장안산 등 불교적인 의미를 가진 산들이 많은데, 그 주된 배경이 무언지 밝혀내야 한다.

남원 만복사지에도 응급환자와 똑같은 석탑이 있다. 고려 문종 때 창건된 사찰로 문헌에 등장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또 다른 석탑이 있다.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남쪽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석탑은 대부분의 탑재석이 없어지고 일부 남은 것도 참담한 모습이다. 무엇 때문에 문헌에 초대받지 못하고 탑재석도 그토록 심하게 훼손됐는지 어느 누구도 그 석탑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임실 진구사지에도 붕괴된 석탑이 있다. 본래 임실 용암리 사지로 불리다가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발굴조사에서 출토되어 그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 만들어질 정도로 번창했던 진구사의 발전상을 자랑하던 석탑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다행히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가마에서 생산된 초기청자가 가장 많이 나와 후백제 왕실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방증해 줬다.

실체 규명 위해 학자 노력·행정 지원

지금까지 살펴본 석탑과 불상은 그 시기가 단순히 나말려초로만 두리뭉실하게 알려졌다. 그런데 그 연대를 엄밀히 말하면 후백제다. 그렇다면 후백제 때 창건됐거나 융성했던 사찰들이 무슨 이유로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을까? 우리들이 꼭 밝혀내야 할 역사의 비밀이다. 전북지역에서 머리가 없는 불상과 붕괴된 석탑은 후백제 멸망의 아픔을 전해주는 역사책과 같은 것이다. 앞으로 후백제 불교미술의 실체와 그 역동성을 심층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과 행정당국의 지원도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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