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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이중주 - 손훈영
[20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이중주 - 손훈영
  • 전북일보
  • 승인 2016.01.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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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권희원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초록 숲 위로 투망처럼 드리워져 있다. 베란다 창 앞으로 바투 다가와 있는 산은 이제 마악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창을 열어두고 다가오는 여름을 바라본다.

팡, 팡. 열어 둔 창으로 테니스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 부딪히는 소리 사이사이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섞여든다. 힘껏 내리친 공이 빗나갔는지 안타까운 탄식이 터지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쳤을 때의 환호성이 높다랗게 들려오기도 한다.

베란다로 나가 테니스장을 내려다본다. 높푸른 히말라야시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테니스장은 치외법권 지역인양 아늑하다. 알맞게 다져진 맨 흙바닥이 정갈하고 높다란 심판석 의자의 진초록 덮개가 새뜻하다.

연두색 공들이 네트 위를 빠르게 오간다. 황토빛 흙을 박차고 하얀 운동복이 튀어 오른다. 튕겨 오르는 공을 따라 공기를 가르는 사람들의 그을린 허벅지 위로 햇살이 작열한다. 약동하는 생명력이 라켓 한복판에서 전율하고 터질 것 같은 율동성이 코트를 가득 메우고 있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소리로 흥건한 테니스장을 벗어나 시선을 조금 오른편으로 옮긴다. 봉긋한 봉분 세 개를 감싸 안고 있는 야트막한 동산이 보인다. 조밀한 숲을 병풍처럼 두른, 나무 없는 낮은 구릉은 푸른 풀들이 융단을 깐 듯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공기 중에 보랏빛 풀꽃들이 고요하다. 이따금 비롱비롱 산새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날아든다.

투명한 햇살 아래 둥그렇게 누워있는 봉분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생로병사의 긴 여로를 마감한 삶은 이제 비로소 진정한 안식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훼손시킬 수 없는 견고한 평화다. 살면서 늘 갈구하던 그것을 이윽고 품안에 안고 흔들림 없는 침묵으로 고요하다.

봉분은 하나의 메시지다. 비등점에 이를 때까지 열렬히 살라고, 그리하면 마침내 이런 확실한 것 하나 안겨 주겠다는 신의 약속이다. 약속은 적요한 햇살 아래 명확하게 빛나고 있다. 저 약속들은 이미 도처에 새겨져 있었다. 다만 두려워 우리들이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네 삶의 공간으로부터 멀리 추방시켜 놓았었다.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살아가지만 삶이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어야만 우리들은 살아갈 수 있었다.

얼마 전 중병을 선고받음으로써 죽음과 좀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투병의 시간이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다. 나와는 별 상관이 없던 그것이 이제 불가분의 관계로 가까워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어둠이 더 무서워지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죽음을 바로 볼 수밖에 없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바로 죽음이다. 죽어있는 상태로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 마음이어선지 요즘 들어 잔치에는 잘 가지 않아도 죽음의 장소는 열심히 찾아다닌다. 가까운 친인척 장례식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요양병원에 누워있는 먼 친척까지 문안을 간다. 정기 진료일이면 병원 장례식장을 서성대다 오기도 한다. 쇠락의 냄새와 죽음의 기미에 점점 익숙해지고 마침내 그것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무엇으로 내 일상에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며칠 전 시백부 상을 치렀다. 입관을 지켜보았다. 입관실은 삶과 죽음이 아무런 갈등 없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주검 옆에 싱크대와 세제가 천연덕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에 익숙한 세제와 핸드크림이 삶과 죽음과의 거리를 빠르게 단축시켜주었다.

전통적 예법에 준한 절차로 구순을 넘긴 백부는 봉인되었다. 딸들의 흐느낌이 백부의 감긴 눈 위로 흩어졌다. 차가운 테이블 위에 일자로 누운 백부의 한 줌 몸뚱아리를 겹겹이 싸매고 묶는 절차가 당연한 수순을 밟는 듯 자연스러웠다.

장례관리사들의 일상적인 표정과 직업적 몸짓이 한 사람의 죽음에 압도당해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럴 거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살아있음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죽음이 저 먼 곳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누수로 얼룩진 천장이나 수도꼭지만큼이나 우리들 삶 속에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과실 속에 씨가 들어있듯 삶이 시작될 때 이미 죽음도 함께 잉태되었다’는 릴케의 말이 생각났다. 삶 속에 죽음이 있다는 말이 하나의 관용어구가 아니라 생생한 느낌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표면과 이면이었다. 삶이 끝난 다음에 비로소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시작되면서 죽음도 함께 시작되었다. 삶이 무르익으면 죽음도 함께 무르익었다. 사람은 삶만 사는 게 아니라 죽음도 함께 살아야 했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이었다. 잘 죽을 수 있으려면 잘 살아야 함이 전제되었다.

죽음의 절차를 지켜보며 살아갈 일을 생각하는 나를 보았다. 죽은 자를 보내는 시간 속에서 산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진실한 약속 하나를 하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떠나는 자에게 남아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약속은 무엇일까. 당신 곁으로 갈 때까지 더 멋지게 살아가겠다는 새김질이 아닐까.

막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에게 하는 약속은 신에게 하는 약속이나 진배없었다. 혹 이것이 죽은 자에 대해 산 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조문행위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성복제를 지내는 의식들이 이어지는 그 시간만큼 나 자신이 삶에 대해 열렬해지던 때가 또 있었을까. 명확한 죽음 앞에서 삶도 명확해졌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자의 육신을 눈앞에 두고 삶에 대해 열심을 다짐하는 오롯한 시간이었다. 내 다짐이 더 뜨겁고 간절할수록 장례의 의미는 깊어지고 죽은 자와의 관계는 더 두터워졌다.

우리 집 베란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전망을 안고 있다. 왼편 테니스장은 살아있음을 음미하기에 좋고 오른편 봉분은 죽음을 명상하기에 더 할 나위 없는 풍경이다. 생사가 원래 같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삶의 충동인 테니스장과 죽음의 집인 봉분이 환한 햇살 아래 거리낄 것 없이 어우러지고 있다. 귀를 열면 약동하는 생명의 환호성을 들을 수 있고 눈을 돌리면 언제나 고즈넉한 봉분을 마주 볼 수가 있다. 삶과 죽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전망이 이 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십년 넘게 이 집을 지키고 있다.

산책길일까, 테니스장과 야산 사이의 작은 오솔길로 초로의 할아버지와 예닐곱 손자가 손을 맞잡고 올라간다. 호기심 많은 손자의 해찰에 할아버지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고른다. 그들 속에 삶이, 또한 죽음이 있다. 삶과 죽음의 두 얼굴이 사이좋게 그들의 등 뒤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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