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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세상의 중심으로 이끄는 글쓰기 - 내가 쓴 글로 타인의 삶이 충만해진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팡세〉를 쓴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몇 마디 덧붙인다. "나로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 그 하찮은 것이 모든 땅덩어리를, 황후들을, 모든 군대를, 온 세계를 흔들어 움직이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도 변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제국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조금만 덜 예뻤더라면) 파스칼의 말처럼 세계의 역사가 정말로 바뀌었을 것인지 단언할 수는 물론 없다(일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볼품없이 뾰쪽한 매부리코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외모가 아니라 지성미 넘치는 내적 매력으로 당대의 영웅들인 제왕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인류의 역사가 바뀔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클레오파트라처럼 멀리 갈 것까지도 없다. 만약 나치와 히틀러가 없었다면 20세기 세계사가 바뀌었을 거라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영향력이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다. 물론 이건 펜으로 제유되는 '문화'가 어떤 무력武力도 무력無力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경구驚句다. 클레오파트라나 히틀러에 비교하는 것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펜 끝에서 만들어진 한 편의 글/책은 그걸 쓴 사람 자신은 물론이고, 때로는 수많은 이들의 삶의 물줄기를 바꿔놓음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될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작중에 묘사된 베르테르처럼 파란 상의와 노란 바지에 조끼를 걸치는 옷차림이 유행했고, 처녀들은 샤롯데처럼 사랑 받기를 갈망했다고 한다. 남편의 사랑이 부족한 것을 탓하며 이혼하는 젊은 부인도 급증했으며, 급기야 작중의 주인공을 따라 하느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게 바로 저 유명한 '베르테르 효과'다.우리들 대부분은 물론 클레오파트라나 히틀러처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을 만큼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아니다. 괴테와 같이 위대한 작품을 쓴 대문호도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누가 뭐라 해도 세상의 중심은 '나' 아닌가. 세상의 어떤 변화도 그 출발점은 '나 자신'인 것이다. 나의 변화는 가까운 타인에게 크든 작든 영향을 준다. 내가 쓴 글도 마찬가지다. 그건 일차적으로 나를 가꾸고 키워서 변화시키지만, 내가 쓴 글에 공감하는 많은 이들도 변화시키는 힘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런 게 쌓여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게 글인 것이다. 내가 쓴 글로 많은 사람을 기쁨과 환희의 세계로 이끌 수도 있다는 걸 한번 상상해 보자. 내가 쓸 글을 읽은 뒤 오랜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삶의 이정표를 발견한 누군가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실로 가슴 벅찬 일이지 아니한가. 그건 어디까지나 괴테와 같은 대문호나 유명한 문필가들의 몫일뿐이라고 생각하는가. 감명 깊게 읽은 책 한 권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쓴 글을 누군가 읽고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리하여 내가 바라는 대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걸 발견할수록 글쓰기는 더욱 풍요로워진다. △글 나고 사람 났다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이 속담에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모름지기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당위'의 뜻도 들어 있다. 이름을 남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장차 훌륭한 업적을 남길 대통령이 되겠는가, 아니면 김연아 선수처럼 올림픽에 나가서 그 종목의 선구적 금메달을 목에 걸겠는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글쓰기도 그중 하나다. 물론 글을 쓴다고 누구나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우리들 각자의 삶을 충실히, 그야말로 사람답게 살아가게는 해준다. 아니, 글쓰기야말로 그걸 가능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이고 손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사람으로 세상에 났으면 글을 쓰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고, 사람 나고 글 난 게 아니고 '글 나고 사람 났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끝) 우석대 교수

  • 주말
  • 기고
  • 2013.08.09 23:02

[⑮스마트폰으로 그들과 소통하라] 짧은 문자, 센스 발휘하면 기대이상 효과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가장 가까운 곳에 가족이 있다. 친구도 있고, 직장 동료와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들과 차를 마시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한다. 밤늦도록 술을 마시는 것도 대개는 누군가와 함께다. 그들 안에 내가 있고, 그들 또한 내 안에 있다. 그게 삶이다. 나 아닌 누군가하고 활발하게 소통하는 것, 그런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보람을 느끼며 즐거움을 찾는 것이 우리네 삶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모든 소통은 자기표현으로 시작된다. 이 '자기표현'은 사람이 갖고 있는 본능 중 하나다. 실제로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드러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한다. 예술 장르와 같이 고도로 정제된 자기표현의 방법도 물론 있다. 화가, 작곡가, 가수, 연출자, 건축가는 그 분야의 양식에 맞는 작품을 창작하고 그걸 발표함으로써 많은 이들과 소통한다. 이런 소통이야말로 우리들 각자의 삶을 결정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걸 전달하는 수단이 최근 들어 크게 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엽서나 편지의 자리를 카톡, 문자메시지 등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카톡문자메시지내일(23일) 저녁 여섯시'꽃마름'(290-1322)에서교수님들과 졸업생들의꽃다운 만남이 있습니다.후딱 내일이었음 좋겠죠,그쵸?흔히 주고받는 문자메시지 중 하나다. 짧은 두 문장으로 전하려는 말을 다 하고 있다. 전화번호를 덧붙여서 모임 장소를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도 돋보인다. 식당 이름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꽃다운 만남'은 단어를 적절히 활용하는 재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애교 섞인 마무리가 고명처럼 깜찍한데, '꼭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쓴 것보다는 감칠맛이 더하다. 문자메시지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가까운 이와의 친교활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날 엄마에게 심통을 부린 것도 어렵지 않게 사과할 수 있다.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수도 있다. 교수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십니다. 엉? 넌 누구지? 방금 교수님 강의를 듣고 나온 학생입니다. 그래? 아무튼 고맙다. 예, 교수님.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 고맙다. 근데 너는 무슨 과 누구지?저어.... 경영학과 서우석이라고 합니다. ㅎㅎ그래 우석이, 너도 열심히 공부해라. 꾸벅. 그럼,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한눈에 보아도 대충 짐작이 가는 대화일 것이다. 학생은 스마트폰의 〈카카오톡〉으로 자신이 수강하고 있는 교과목 담당교수와 즉석에서 소통을 시도했고, 교수 또한 학생과의 소통에 기꺼이 응한 모습이다. 이 또한 정겹지 않은가.다소 뜬금없기는 해도 이런 문자메시지를 받고 기분이 상할 교수가 있을까.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은 끝까지 추적해서 혼쭐을 내거나 학점에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씩씩대는 교수라면 그는 강의를 마친 뒤 연구실로 곧장 가지 말고 가까운 매장에 들러서 스마트폰을 반납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어쨌든 자신이 즉흥적으로 보낸 메시지에 적극적이고 친절하게 화답해 준 교수에게 학생은 평소보다 더 큰 호감이 생길 것이다. 이런 문자메시지 대화를 계기로 어쩌면 두 사람은 평생을 두고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서든 쓰는 편지글쓰기를 통한 타인과의 소통은 그 대상을 제한된 인원으로 미리 정하고 쓰는 것과, 대상이 불특정 다수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이런 구분은 글의 특정한 양식과 직접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신이 쓴 글을 전달하는 매체에 따라 소통하려는 대상이나 범위가 달라진다는 뜻이다.소통하려는 대상을 미리 지정하고 쓰는 대표적인 글이 편지다. 지금 40대 후반 이상의 연령대에 있는 이들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던 젊은날의 추억을 적어도 하나쯤은 갖고 있으리라. 연애편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듬뿍 실어야 하는 글일수록 깊은 밤에 썼다. 편지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썼고, 은사님께도 써서 보냈다. 군대에 가 있는 친구나 선후배에게도 편지를 썼다. 초등학교 때는 '국군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통신수단이 오늘날처럼 다양하고 빠르게 발달하기 전의 이야기다. 요즘에는 편지든 엽서든 펜을 쥐고 종이에 직접 쓰는 일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그렇긴 해도 펜으로 쓴 편지나 엽서는 그걸 받아서 읽는 이의 마음에 더 큰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용한 소통수단임에 틀림없다).오늘날 그 편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다. 특히 스마트폰은 과거의 휴대전화와 달리 컴퓨터 이메일 기능까지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소통 수단으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우리는 목소리 대화나 문자메시지를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길든 짧든 누군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스마트폰 메시지 기능을 자주 이용한다. 그런 문자로 우리는 친한 친구나 가족들하고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카카오톡을 이용하면 통신요금을 별도로 내지 않아도 얼마든지, 심지어는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울 수도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편지쓰기도 가능하다. 학교나 직장을 오가는 버스나 전철 안에서든, 커피숍에서든, 술집에서든 조금만 짬을 내면 얼마든지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에게 보낼 수 있다. 제 아무리 긴 편지도 다 쓸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스마트폰 안에는 펜도 있고 편지지도 들어 있다. 다 쓴 편지를 접어서 담을 수 있는 편지봉투도 있고, 겉봉을 붙일 수 있는 풀도 있고, 우표도 있다. 대부분의 주소는 열한 자리 숫자로 이미 입력이 되어 있어서 그걸 골라 선택만 하면 끝이다. 우표 값은 봉투 편지보다 훨씬 저렴하다. 물론 다 쓴 편지는 통신회사에서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전달해준다.이메일은 문자메시지보다 과거에 펜으로 직접 썼던 편지에 더 가깝다.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은 실제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한두 마디씩 말을 나눠 쓴다. 하지만 이메일은 엽서나 편지 형식을 띠는 게 일반적이다. 문제는 주어진 여건이 아니고 쓰고자 하는 마음, 즉 생활화된 글쓰기 습관일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데, 아무리 그런 여건이 주어져도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자주 써서 누군가에게 보내야 그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 자, 이제는 각자 주머니에 들어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시작 버튼을 누르자. 게임의 유혹은 잠시 접어두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이메일을 쓰든, 노란색 〈카카오톡〉 아이콘을 손가락으로 누르든, 〈페이스북〉을 열고 들어가든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면 된다. 그런 다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에게 편지를 쓰든지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그런 소통이 그와의 거리를 한층 좁혀줄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삶도 그만큼 풍성해질 것이다. 우석대 교수

  • 주말
  • 기고
  • 2013.08.02 23:02

[⑭ 하루 석 줄 쓰기로 충분하다] 일기 쓰다 보면 생각하는 습관 기를 수 있어

△일기쓰기의 즐거움어릴 적 방학숙제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방학생활일기'였다. 그건 누구에게나 지겹고 귀찮은 일이었다. 그걸 왜 써야 하는지 선생님이나 엄마는 자상하게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하긴 설명을 들었다 해도 그걸 제대로 이해할 수도,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겼을 리도 없을 테지만.물론 처음 이삼 일은 어찌어찌 쓰긴 한다. 하지만 그러고는 그만이다. 그야말로 작심삼일이다. 결국 일기장이 어디 쑤셔 박혀 있는지도 모르고 방학을 다 보낸다. 개학날이 다가오면 슬금슬금 걱정이 되다가 어쩔 수 없이 한 달 일기를 한꺼번에 벼락치기로 쓴다. 그때마다 달력에 날씨라도 적어놓을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한다. 요즘에도 일기 숙제라는 게 있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한테 일기를 쓰게 하는 건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면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한다는 점은 일기쓰기의 소중한 가치임에 틀림없다."나는 요즘 정말 재미가 없다. 매일매일 똑같이 산다. 나는 어제 아침에 늦잠을 잤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었는데 오늘도 늦잠을 잤다고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지각했다. 선생님한테 야단도 맞았다. 더럽게 화장실 청소를 또 했다. 어제도 학교 끝나고 영어학원 가고, 피아노학원 가고, 집에 와서 밥 먹고 텔레비전을 봤다. 생각해 보니 오늘도 똑같다. 그래도 일기 숙제는 해야 하는데 뭘 써야 하나. 나는 요즘 사는 게 정말 재미가 없다. 인생은 원래 이렇게 재미가 없는 건가 보다."이 아이도 일기를 쓰다 보니(혹은 써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가 없다'는 걸 제법 진지하게 생각했고, 또 그걸 새롭게 발견하지 않았는가. 이 아이는 어쩌면 적어도 다음날 하루는 일기로 쓸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게 될지 모른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엄마나 선생님께 야단도 안 맞고, 더럽게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했던 짝꿍 여자애한테 자신이 아끼는 예쁜 필통을 선물할지도 모른다. 혹시 딱지를 맞더라도 아이는 그러면서 성장해가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림일기든 생활일기든 방학일기든 우리의 글쓰기는 대부분 일기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기는 다른 글과 차별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매일 써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쓴 일기를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릴 때 일기를 쓰기가 싫었던 건 별로 쓰고 싶지도 않고 쓸 만한 일도 없는데 매일 꼬박꼬박 써야 했기 때문이었던 건 아닐까. 부모나 선생님께 일기숙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건 곧 자신의 속마음을 누군가가 엿보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일기를 쓰기가 고역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글쓰기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게 된 원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숙제가 아니므로 일기를 매일 쓸 필요까지는 없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따위를 틀릴까 봐, 누군가 자신이 쓴 일기를 몰래 훔쳐볼까 봐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쁨실망마음의 정화옷장을 정리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먼저 옷장의 옷들을 모두 꺼낸다. 각종 스카프나 머플러, 벨트, 모자, 양말 같은 것들도 모조리 방바닥에 꺼내놓는다. 언제 이렇게 다 뒤죽박죽으로 쑤셔박아 두었던가 싶은 것들까지 마구 쏟아져 나온다. 유행이 너무 지나서 앞으로도 도저히 입을 수 없을 것 같거나, 몸에 두르거나 걸칠 일이 없겠다 싶은 것들은 과감하게 헌옷 수거함으로 보낸다. 나머지는 계절별로 분류하고 개켜서 서랍에 넣거나 옷걸이에 걸어놓으면 옷장 정리가 끝난다. 일기를 쓰는 것도 옷장 정리와 같다. 일기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손으로 적어서 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행위이고 과정이다. 옷장 속에 든 옷들을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정리하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정돈된 옷장처럼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서 정리할 수 있는 게 바로 일기이고 글쓰기라는 말이다. 이처럼 일기쓰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정리하는 데 한층 유용하다. 자신이 잘한 일이나 잘 못한 일, 즐거웠거나 속상했거나 보람 있었던 그날의 일을 단 삼십 분이라도 책상 앞에 차분히 앉아서 돌아보는 것이다. 그걸 곱씹어가며 글로 옮겨 쓰다 보면 미처 떠오르지 않았거나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던 생각들까지 새롭게 정리되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기쓰기는 자신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통증을 치유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굳게 믿었던 누군가의 배신으로 분노를 삭일 수 없어서, 혹은 본의 아니게 가깝고 소중한 사람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런 감정을 모조리 끌어내서 그날의 일기로 써보는 것이다. 내게는 과연 아무 허물도 없었는지, 나는 그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기를 바라는지, 그가 진정으로 내게 실망한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서 한 자 한 자 써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지도 모른다. 자신이 상대에게 취했던 행동이 부끄럽다고 해서 생각하기를 꺼리거나 감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누가 엿보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남김없이 솔직하게 쓰는 것이 좋다. 그러면, 사실은 그렇게 분노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내 행동에 실망한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조차 주체할 수 없었던 슬픔이나 분노 따위들을 객관화시켜서 마음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효과는 물론 일기쓰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겪은 일 중에서 기억할 만한 것들이 있으면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쓰는 것이다. 또 일기를 쓰는 데 있어서도 분량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어떤 일이든 규모를 미리 정해두면 시작하기가 어렵다.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를 오늘 처음 들었다. 함박눈처럼 나부끼는 벚꽃의 고운 빛깔에 취하고, 〈벚꽃 엔딩〉의 경쾌한 선율에 흠뻑 젖었던 하루.골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떠올리기도 귀찮고 무얼 복잡하게 생각하기도 싫은 날은 이렇게 단 서너 줄만 써도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쓰느냐가 아니라, 쓰는 것 그 자체라는 말이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쓰기 편한 글이 바로 일기다. 자신이 직접 부딪쳐서 겪은 일을 쓰기 때문이다. 일기는 글쓰기를 습관화시키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볼펜으로 노트에 써도 좋고, 컴퓨터를 이용해도 좋고, 스마트폰에 써도 무방하다. 유명한 작가도 처음에는 일기와 같은 자신의 이야기부터 쓰기 시작했다는 걸 기억해 두자. 그러다가 차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섞어서 쓰기도 하면서 글의 내용과 범위를 확장시켜 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도 생기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다 보니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도 넓고 깊고 커진 것이다. 글쓰기 공부로 일기를 충실히 쓰는 것만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장 오늘 밤부터 일기쓰기를 시작하자.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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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26 23:02

[⑬ 이야기의 인물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시대에 맞는 배경·상황 써야 사실감 있어

△연애-변심-엇박자그때 우리 나이가 아마 20대 후반쯤이었을 테니 벌써 30년도 넘게 지난 일이다. 그해 겨울 어느날 여고동창생들인 우리는 겨울바다를 구경하려고 대천으로 향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휴게소에 들렀다. 벤치에 둘러앉아서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마시다 보니 첫눈이 하얗게 내리는 게 아닌가. 그러자 집 떠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갑자기 남편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막 글쓰기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어느 주부글쓰기 모임의 회원이 쓴 글 중 일부다. 이 글에서 구사한 문장을 보면 그간의 노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문장 하나하나가 크게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다. 사건이나 생각의 전개방식도 매끄럽다. 그런데 내용은 별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을 읽는 이는 몇 가지 의문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여고동창들과 겨울바다를 구경하러 간 게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넘게 지난 일이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20대 후반쯤만 되어도 대부분 결혼을 했을 테니 부잣집 젊은 마나님들이 자가용을 몰고 바다구경을 갔다고 한 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치자. 그런데 30년 전에도 서해안 고속도로라는 게 있었나? 그 고속도로는 1991년에 개통된 걸로 나와 있는데? 그러면 기껏해야 20년 조금 넘게 지난 거 아닌가? 아무리 부잣집 마나님들이라지만 휴게소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마셨다고? 그 시절에는 '아메리카노'라는 커피는커녕 그런 이름조차 없었는데? 한 술 더 떠서, 또 뭐라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다녔다고? 그걸로 즉석에서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그이'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면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고 해야 맞는 거 아닐까? 이 글의 내용이 조금 황당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한다. 연인의 느닷없는 변심 같은 것도 그중 하나다.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자기하고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가겠다고 맹세했던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너무너무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으니 이제 그만 만나자고 하는 것이다.그게 왜 황당할까.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했으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변치 말고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속 사랑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로미오하고 줄리엣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목숨을 던져서라도 한 번 맹세한 사랑을 지켜가든가. 그래도 어쩌겠는가. 마음이 그렇게 변했다는 걸, 이렇게 변한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으니 그냥 눈 딱 감고 〈진달래꽃〉처럼 말없이 고이 보내달라고 숫제 애원을 하고 나서는 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푸슈킨이 일찍이 그렇게 노래했던 것도 삶의 그런 속성을 간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이렇듯 전혀 예기치 못했던 황당한 일도 겪으면서 살아가기도 하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 △ KTX와 빨강 트래킹화 임진왜란이 시대적 배경인 TV 사극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적진으로 염탐을 갔던 장수가 말을 타고 드넓은 평원을 달리며 진지로 돌아오는 장면이 눈앞에 긴박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걸 마른침을 꼴깍 삼켜가며 지켜보고 있는데 저 멀리 보이는 산 아래로 난데없이 KTX 한 대가 힘차게 지나가고 있다면, 아, 이 노릇을 어쩌면 좋은가. 본진에 도착한 그 장수가 말에서 뛰어내리는데 보니까 유명 상표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붉은색 트래킹화를 신고 있다면, TV로 그런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찬호는 벌써 사흘이 넘도록 외출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고등어 사려, 갈치 사려. 싱싱한 물오징어도 사세요.' 주택가 먼 골목길을 빠르게 지나가는 생선장수 아저씨 목소리가 귓속을 쟁쟁하게 울렸다.찬호는 어제 PC방에서 함께 게임을 하면서 놀았던 친구들의 말에 따라 자신의 페이스북을 꾸미느라 하루 종일 낑낑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게 쉽지 않았다. 소설 습작을 열심히 하고 있는 어느 대학생의 글에서 일부를 따왔다. 그런데 어떤가. 좀 이상해 보이지 않은가. 다 읽었는데도 그런 점을 별로 발견할 수 없다면 한 번 더 꼼꼼히 읽어보자. 그러면 앞서 말했던 바로 그 'KTX'와 '붉은색 트래킹화'가 눈에 띌 것이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만든 역사극처럼 이야기와 사건의 사실감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고 했다. 적어도 밤 열 시는 넘어야 우리는 밤이 깊어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깊어가는 밤중에 생선장수 아저씨가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설령 있다 해도 생선장수는 골목길을 빠르게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근처에 사는 누군가가 생선을 사러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느릿느릿 걷지 않을까. 그리고 주택가 먼 골목길에서 들리는 생선장수의 목소리가 어떻게 귓속을 '쟁쟁하게' 울릴 수 있단 말인가. 또 있다. 요즘에는 생선을 작은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파는 게 일반적이다. 그것도 미리 녹음한 걸 반복해서 틀어주는 방식으로 생선장수가 왔음을 알린다. '고등어 사려, 갈치 사려. 싱싱한 물오징어도 사세요.'라고 하는 식의 육성을 통한 호객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지고 없다. 그야말로 구시대의 유물이다. 어떻게 하면 생선장수의 이런 호객 내용 하나까지도 글로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어쩌다 아파트 단지에 생선을 실은 트럭이 들어오면 거기에서 어떤 말이 녹음되어 흘러나오는지 귀를 활짝 열고 들어보라. 녹음된 내용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의 톤이나 템포까지도 세심하게 들어두라. 스마트폰을 들고 나가서 녹취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다. 기차나 전철의 안내방송 같은 것도 녹취를 해서 '글쓰기 자료' 파일에 옮겨 적어 놓으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글 속에 등장하는 작중화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다음 장면을 보자. 김 대리와 박 대리는 모텔 출입문을 열고 골목길로 나왔다. 길 건너편에 있는 허름한 순대국밥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모텔 청년이 일러준 바로 그 집이었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물컵을 챙기며 그들을 맞았다. 두 사람은 창가 쪽 자리에 마주앉았다."주모, 여기 국밥 두 그릇만 말아주소."선배인 박 대리를 대신해서 김 대리가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라고 했는가. 50대 중반인 국밥집 아주머니가 손님에게 그렇게 말하는 걸 들어본 적 있는가? 그냥 "어서 오세요." 정도 아닐까? 그리고 지금이 무슨 조선시댄가, 아니면 일제 말기나 해방 직후 어느날 쯤인가. "주모, 여기 국밥 두 그릇만 말아주소."라고? 이런 식의 음식 주문법은 1960년대 이전에 이미 효력이 만료된 표현이다. 자, 그럼 어떻게 써야 하는가. "아줌마, 여기 순대 둘요." 보나마나 이런 식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읽는 이가 그 소리를 생동감 있게 들을 수 있을 거 아닌가. 그런데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 식당이 두 사람의 오랜 단골집이라면 다음과 같이 써야 사실감을 높일 수 있다는 거, 손끝에도 새겨두고 마음속에도 깊이 새겨두었으면 좋겠다. "이모, 우리 순대 둘."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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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19 23:02

[⑫ 상상력이 필력을 결정한다]자세히 관찰하고 메모하는 습관 들여라

소개팅 자리에서 처음 만난 여자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걸 알고 남자는 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단다. 그게 미심쩍어 보였던 여자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으며 웃느냐고 남자에게 물었단다. 그러자 남자가 곧이곧대로 이렇게 대답했단다."제가 상상력이 좀 풍부한 편이거든요."약간의 결벽증까지 갖고 있던 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자에 놓인 물컵을 남자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자리를 떴단다. 여자들이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맨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변기의 물을 내리는 것이다. 밖에서 남자의 기척이 느껴질 때는 그 일에 더 적극적이다. 왜겠는가. 자신이 옷 벗는 소리를 감추려고 그 아까운 물을 허투루 쏟아버리는 것이다. 아니, 그런데 사실은 소리 때문이 아니다. 그 소리를 듣고 누군가 자신의 벗은 몸을 '상상'할까 봐서다.왜 있지 않은가. 김광균의 시 〈설야〉에 나오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대목도 옷을 벗는 '소리'와 상상을 통해 눈앞에 그려지는 시각적 이미지를 결합해서 공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여인숙 ? 이슬의 집 달개비꽃 밑에 / 여인숙 치는 / 여치 / 숙박계도 안 쓰고 / 하룻밤 자고 가는 / 이슬 / 하늘일까 / 지상일까 / 이슬의 / 집 (유강희, 〈이슬의 집〉 전문)밤사이 소리없이 내린 이슬은 어느 꽃잎이나 나뭇잎에 머물다(숙박계도 안 쓴 공짜 잠을 자고) 아침이 오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슬과 꽃잎이 스스럼없이 동화되는 자연 현상에서 시인은 혹시 우리가 꿈꾸는 삶의 자유와 여유를 보았거나 그걸 간절히 열망한 건 아니었을까. 시인의 그런 생각과 느낌이 이 짧은 시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시를 쓰는 게 가능했던 건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밤마다 찾아오는 이슬을 상대로 달개비라는 꽃에 여치가 여인숙을 친다는 이야기는 상상의 힘이 아니고는 쓸 수 없을 거라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상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아무리 사전이라도 그건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이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내고, 또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기괴하게 생긴 인물들을 한번 떠올려 보라. 이 세상에서 아바타와 똑같이 생긴 생물체가 발견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그건 누구나 처음 보는 생물체다.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은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보았던 아바타의 모습을 조목조목 떼어놓고 보라. 모두 눈에 익은 것들 아닌가. 쫑긋하게 솟은 귀는 당나귀의 것과 흡사하게 생겼다. 아바타의 피부 생김새나 빛깔 역시 어느 파충류나 깊은 바다에 사는 해괴한 물고기의 표피 등을 떠올리게 한다. 아바타와 같은 꼬리를 가진 동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전체적인 모양새는 사람을 닮지 않았는가.상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나 '존재하는 대상'을 되살려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합하는 것이 상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직접 겪었거나 어딘가에서 보고 들었던 장면이나 사건을 되살려서 새로운 모양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상상력인 것이다. 국어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미리 준비한 용지를 나눠주며 지난주에 3박 4일 동안 다녀온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각자 보고 느낀 것이 있으면 뭐든 좋으니까 형식이나 분량에 구애받지 말고 맘껏 적어보라고 말했다. 한 시간 후에 보니 어떤 학생은 석 장을 썼고, 어떤 학생은 일곱 장을 썼다. 물론 한 장도 제대로 못 쓴 학생도 있었다.자,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물론이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스무 장도 넘게 쓸 수 있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같은 기간에 똑같은 곳을 여행하고 왔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어떤 학생은 스무 장도 넘게 썼는데, 어떤 학생은 한 장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역시 상상력의 차이다.상상력을 키우려면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물론 경험을 많이 쌓는다고, 이것저것 본 것이 많다고 상상력이 저절로 풍부해지는 건 아니다. 이때 필수적인 것이 바로 자세히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정리하는 습관이다. 좀 특이한 것이 있으면 다가가서 만져도 보고 요모조모 살펴보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요모조모 뜯어보고, 카메라에 담고, 자신만의 감상을 수시로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는 말이다. 글은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켠 순간부터 쓰는 것이 아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사물이나, 아름답고 특이한 장면을 마음을 활짝 열고 바라보고 있다면 그 시간에도 당신은 이미 글을 쓰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황당한 사건을 곱씹어가며 요모조모 생각을 굴리는 것도 글을 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하는 즐거움세상에서 제일 잠이 많은 사람은? 가수 이미자다(이미 자고 있으니까). 그럼 세상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은 누구인가? 주말이나 휴일이 아닌 평일에 낚시질하는 사람이다(탤런트 한가인이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그게 이 '한가한' 유머의 답이었다.). 그런데 평일에 낚시질하는 사람보다 더 한가한 사람이 있다. 누구겠는가. 바로 그 사람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이다. 물론 우스갯소리다.글을 쓰려고 하는 당신은 그래도 평일 낚시까지 맘껏 즐겨도 좋다. 대신 낚시의 덕목이라는 무념무상(無念無想)만은 삼가도록 하자. 호수의 수면에 꽂힌 찌를 노려보기도 하고 째려보기도 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자. 낚싯대를 타고 전해지는 손맛도 깊이 음미하자. 낚시 바늘에 물린 붕어의 파닥거리는 몸짓도 눈에 새겨두자. 틈날 때마다 옆자리에 앉은 낚시꾼의 표정 하나도 유심히 관찰하자. 어쩌다 비라도 내리면 빗방울이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자. 수면을 덮은 연꽃잎 하나라도 그 생김새를 유심히 쳐다보고 거기에 고인 빗물은 얼마나 투명하게 빛나는지 눈빛을 빛내도록 하자.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 카메라를 머뭇거리지 말고 거기에 가까이 들이대기도 하자. 오렌지의 시큼한 맛도 지금까지와 달리 더 깊이 음미하자. 뚝배기에서 보글 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기서 풍겨나는 구수한 냄새도 가슴속으로 깊이 맡아보자. 된장찌개가 끓는 소리도 들어보고, 그 모양도 남김없이 눈에 담아두자.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물과 닮았는지 연상해 보자. 평소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카메라에 담고, 두고두고 세심하게 느끼고, 큼큼거리며 냄새를 맡았던 것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키워서 독창적이고 풍부한 내용이 살아 있는 글을 쓰는 데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주력(酒力)이 필력(筆力)'이라는 그럴싸한 궤변도 있지만, 상상력, 그것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처럼 당신의 필력을 든든하게 받쳐줄 거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자.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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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12 23:02

【⑪ 차갑고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고정관념 깨고 오감의 문 활짝 열자

△S라인과 동가홍상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했다. '동가홍상(同價紅裳)'도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S라인으로 잘 가꾸어진 몸매가 보기 좋은 건 인지상정이다. 사실 쓰기도 어렵지만 차분히 앉아서 꼼꼼하게 읽는 일도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쉽지 않은 게 글이다. 읽을 만해야 좋은 글이라고 했는데, 그 읽는 맛을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각각의 단어와 문장이다. 문장에도 맛이라는 게 있다. 음식에 다양한 맛이 있는 것처럼 문장도 담백한 문장, 쫄깃쫄깃한 문장, 밋밋한 문장, 고소한 문장, 부드러운 문장, 짭짤한 문장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하다. 읽는 이의 눈을 끌어서 전달하려는 효과를 드높일 수 있도록 글을 쓰는 게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걸 문장 구사의 수사(修辭)라고 하는데,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그것이 얼마나 참신하고 그럴싸한가 하는 것이다.자신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문장을 구사하고 싶으면 귀와 눈에 익숙해 있는 상투적인 비유부터 버리는 것이 좋다. 더 이상 '천사처럼' 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라는 말이다. 굳이 쓰려거든 '크리스마스이브의 첫눈처럼' 착하다고 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이제부터는 '성공의 달콤한 열매'니 '뼈를 깎는 고통'이니 '실패의 쓴잔'이니 '계란으로 바위치기' 따위의 낡은 말은 미련없이 쓰레기통에 버리자.'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으면 여름이 이토록 뜨거울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 무슨 억지소리란 말인가. 내가 그대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여름이 뜨겁단다. 내가 만약 그대를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내게 그런 마음이 없으면 여름이 선선할 거라는 얘긴데, 이건 대자연의 섭리나 인과관계에 역행하는 말 아닌가. 그럴 것 같은데 아니다. 그런 물음은 글의 속성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런 표현은 첫눈을 기다리는 간절함과, 그대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표현하기 위해 쓴 역설의 수사인 것이다. 생각해 보자. 대자연의 섭리조차 그대를 사랑하는 내 마음만은 어쩌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만큼 그대를 열렬히 사랑한다는데 누군들 마음을 꼭꼭 닫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고정관념과 오감의 문나만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독창적이고 참신한 문장과 문체를 구사하려면 먼저 고정관념부터 깨야 한다. 미끈하게 잘 빠진 아가씨의 몸매는 예쁘고, 돼지 멱따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짜증나고, 재래식 변소에서 풍겨나는 똥 냄새는 역겹고, 그녀와 함께 떠먹는 아이스크림은 달콤하기 그지없으며,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엄마의 손길은 무조건 따뜻하다고만 생각해서는 오감의 문을 좀처럼 열 수 없다.S라인을 자랑하는 몸매라고 무조건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슬그머니 의문을 제기하면 자신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에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돼지가 꽥꽥거리는 소리는 과연 이맛살을 찌푸리게만 하는가. 죽음을 코앞에 둔 돼지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그 소리에 따뜻한 연민의 정 같은 것도 생기지 않을까. 똥 냄새가 구수하게 여겨진 적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는가. 그녀에게 버림받은 뒤 옛 추억을 아프게 곱씹으며 먹은 아이스크림의 뒷맛은 어쩔 건가. 엄마의 손도 때로는 얼음장처럼 싸늘할 수 있지 않을까.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가수 이문세가 부른 〈옛사랑〉이라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다. 어떤가. '하얀 눈'은 '하늘'에서 내리거나 떨어지기만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야 그것이 '하늘 높'은 곳으로 '자꾸 올라'간다는 구절을 어떻게 쓸 수 있었겠는가. 독창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방법은 또 있다. 평소 생활에서 오감의 문을 시시각각으로 활짝 열어두는 것이다. 오감(五感)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이르는 말이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며, 손으로 만져서 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오감의 문도 열기 위해서도 역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색깔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소리는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며, 냄새는 코로 맡기만 하는 것이라는 보편화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주황색에서 우리는 온몸을 진저리치게 하는 시큼한 맛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노란색을 오래 바라보면서 유치원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새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경쾌하고 아름다운 웨딩마치가 한낮에도 어둠을 몰고 오는 암회색 먹구름이나 오디 씹은 혓바닥처럼 검보랏빛으로 보인다면 무조건 이상하기만 한가. 달달한 아이스커피 맛도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빨간색으로 보일 수도 있고, 연두색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또 계곡에서 물장구치는 소리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사실 모든 글쓰기는 세상 속에 있는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돌멩이 하나도 세상에 있는 사물이다. 나무와 풀, 꽃 한 송이도 나만의 개성 있는 문장을 만드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재료들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고운 자태를 바꿔가는 온갖 자연현상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알싸하게 튀는 나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문장을 구사하고 싶은 당신은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언제 어느 곳을 가든 틈나는 대로 그런 것들에 눈길을 주어보자. 오감의 문을 활짝 열고 평소 눈에 보이는 온갖 사물들을 그에 어울릴 만한 빛깔, 냄새, 소리, 맛, 감촉 등으로 다양하게 비유(比喩)해 보기를 멈추지 말자. 예를 들어 색깔 하나에 눈길과 마음길을 주어본다. 늦가을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낙엽은 대부분 갈색이다. 갈색에서는 비 오는 날의 흙냄새가 풍겨난다. 갈색은 할머니가 끓여주신 청국장이고, 쿱쿱한 냄새가 진동하는 서재이며, 카라멜 마끼아또다. 입안에 군침이 저절로 돌게 노릇노릇 잘 구워진 바게트다. 앞으로는 눈에 비치는 어떤 빛깔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망설이지 말고 소리로도 바꿔 보자. 손이나 입술에 느껴지는 감촉은 눈에 보이는 다른 사물에 견주어보기도 서슴지 말자. 귓속을 파고드는 어떤 소리나, 코끝을 쥐고 흔들다 숨을 멎게 할 만큼 향긋한 라일락도 다른 사물로 은유하거나 직유해 보자. 그러면 사랑하는 이와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동안 입술에 느껴지는 감촉이 보랏빛이거나 주황빛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보랏빛은 꿀벌의 날갯짓 소리일 뿐 아니라 입안에 새콤달콤한 막대사탕 맛을 가져다주기도 할 것이다. 시큼한 석류를 베어 한 입 무는 맛은 햇살을 튕겨내는 물고기 비늘이고, 물고기 비늘은 또 바위에 부딪쳐 잘게 부서지는 물방울들의 투명하게 빛나는 어깨와 어깨들에 은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로부터 절교를 통보받고 듣는 물방울 소리는 또 붉게 핀 동백꽃으로 얼마든지 직유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도 이제부터는 매화든 산수유꽃이든 고로쇠나무든 시냇물이든 돌멩이든 올챙이든 잠자리든 참새든 독수리든 두더지든 호랑이든 축구장이든 커피숍이든 자동차든 냉장고든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이든 의인(擬人)해서 그것들과 대화도 나누고, 어깨동무도 하고, 입맞춤도 하고, 포옹도 하고, 서로의 성감대를 어루만져주기도 하자. 가끔은 그것의 볼을 꼬집기도 하고, 옆구리에 발길질도 해보자. 지금 당신의 몸을 덮고 있는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훌훌 벗어던진 알몸이 되어 그 내면으로 들어가 상상하기도 틈나는 대로 계속하자.그러면 머지않아서 알싸하고 짭조름할 뿐 아니라 어릴 적 학교 앞 문구점에서 주로 사먹었던 불량식품처럼 쫄깃쫄깃한 맛이 살아 있는 나만의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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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05 23:02

[⑩ 음정박자 무시하고 노래 부르기]좋은 글 쓰려면 낱말·문장 제대로 구사해야

△음정박자단어 친구들끼리 노래방에서 노는 동안 '인기 짱'은 누구일까.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일까. 그럴 것 같은데 사실은 아니다. 음정 박자를 완전히 무시하고(가사는 자막으로 정확하게 나온다) 큰소리로 끝까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 왜냐고? 재미있지 않은가. 소음공해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노래는 듣는 사람을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노래에 자신이 없는 친구들한테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용기도 준다. 생각해 보자. 2차로 노래방을 간 건 오로지 재미나게 놀기 위해서 아닌가. 음치가 오히려 대접받는 이유다.하지만 글은 다르다.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는 분위기만 잘 띄우면 그만이지만, 글은 읽는 이에게 새로운 지식이나 생각뿐만 아니라 감흥까지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은 제대로 읽자고 들면 일정한 양의 힘든 노동까지 동원해야 한다. 노래의 기본은 두말할 것 없이 음정과 박자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안다. 그럼 글의 기본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단어와 문장이다. 단어가 모여서 문장을 이루고, 그걸 여러 개 연결해서(한 문장으로 된 글도 있지만) 한 편의 글을 만든다. 음정과 박자를 제대로 맞춰야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 것처럼 좋은 글을 쓰려면 단어와 문장부터 올바로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같은 기본부터 충실해야 한다. 아무리 내용이 풍부하고 창의적이어도 이게 지켜지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 운전자들은 교통법뀨를 잘지켜야 한다. 학생도 반듯이 교칙에 딸아 생활해야한다. 그게 바로 민주시민의 옳바른 자세인 거시다.짧은 문장 세 개로 이루어진 글이다. 물론 어떤 글의 일부분일 수도 있다. '민주시민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평범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에 담긴 주장은 얼마나 당연한가. 나름의 논리도 갖추었다. 그럼 이걸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번 더 읽어 보자.이 세 문장에는 맞춤법에 어긋나거나(법뀨, 딸아, 옳바른, 거시다), 내용에 맞지 않거나(반듯이 반드시), 띄어쓰기가 잘못된(잘지켜야 잘 지켜야, 생활해야한다 생활해야 한다) 단어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물론 초등학생 수준의 아이들도 이 글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맞춤법 같은 건 대충 무시하고 써도 되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이 더러 있다. 글이라는 게 생각이나 느낌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려고 쓰는 것이고, 또 이런 식으로 써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뜻을 단번에 알 수 있지 않느냐는 항변이다. 정말 그런가. △바퀴벌레와 평강공주 운영씨. 어제 우리는 처음으로 만나씀니다. 그래서 나는 운영씨의 순수한 모습에 흠뻑 완전히 빠지고 마랐습니다. 타락하게 사랏던 재 자신이 순수해지는 것도 느껴씀니다. 누가뭐라도 운영씨를 무지 만히 사랑함미다. 부디 저에 사랑을 바다 주시기 바람니다.'운영 씨'는 주위 사람의 권유로 며칠 전에 맞선을 보았다. 상대 남자가 마음에 썩 들었다. 생긴 것도 나쁘지 않았고, 성격도 원만해 보였다. 직업도 그만하면 안정적이었다. 운영 씨는 그 남자한테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오기를 내심 간절히 기다렸다. 사흘 만에 이처럼 긴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자, 이 문자메시지를 읽은 운영 씨는 기분이 어떨까. 맘에 드는 남자한테 사랑 고백을 받았으니 구름에 올라타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까. 아마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남자한테 오만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질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겉만 멀쩡하지 속은 공갈빵처럼 텅 빈 사람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적힌 내용대로 그 남자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면, 그래서 그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했다면 운영 씨 또한 그 남자와 더불어 못 말리는 바퀴벌레 한 쌍일 것이다. 그게 아니면 바보 온달을 용맹한 장수로 키워낸 평강공주를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속으로 몹시 흠모해 왔거나.생각해 보라. 운영 씨가 이 글에 적힌 남자의 마음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그 남자가 자신에게 전달하려는 뜻을 하나도 남김없이 아주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이렇게 맞춤법을 무시하고 써도 그 남자의 마음이 운영 씨한테 과연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겠는가. '전달'이라는 말의 본디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그건 이런 글을 쓴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운영 씨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일 것이다. 운영 씨. 어제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나는 운영 씨의 순수한 모습에 흠뻑 빠지고 말았습니다. 타락하게 살았던 제 자신이 순수해지는 것도 느꼈습니다. 저는 누가 뭐라 해도 운영 씨를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부디 저의 사랑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운영 씨에게 문자메시지를 이렇게 써서 보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남자는. 그런데 안타깝게도 좀 전과 같이 쓰는 바람에 사랑도 놓치고 망신까지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단어를 골라 쓸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맞춤법만이 아니다. 앞서 봤던 것처럼 사용한 단어의 뜻이 전달하려는 내용하고 잘 어울려야 하고, 품격 있는 단어를 골라 쓰는 것도 중요하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는 말도 정확하게 써야 한다. 모양이 같은 단어를 자꾸 반복해서 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각종 문장부호나 띄어쓰기도 당연히 정확하게 구사해야 한다. 사실 우리말은 대단히 과학적이면서도 올바로 구사하기가 쉽지 않은 언어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도 단어를 적재적소에 잘 골라서 정확하게 쓰는 건 글쓰기의 가장 기초적 요건에 해당된다. 사람들이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도 어쩌면 이것부터 자신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렵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평소 다른 이들이 쓴 좋은 글을 유심히 살펴가며 읽는 습관만 가져도 문제를 웬만큼은 해결할 수 있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단어나 문장이 어법에 맞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수시로 확인하는 습관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 이제는 병 주고 약 줄 차례다. 아까 그 노래방으로 다시 돌아가자.노래방에서 다들 가장 싫어하는 친구는 누구일까. 마이크를 잡았다 하면 좀처럼 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음으로 눈총을 받는 축이 있다. 저는 죽어도 부르지 않으면서 다른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기만 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값비싼 술만 축낸다. 그런 친구하고는 노래방에 다시는 함께 가고 싶지 않다. 노래방에 갔으면 잘 부르든 못 부르든 마이크를 잡고 한 곡 뽑아내는 게 좋다. 그러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노래방을 가지 않는 게 좋다. 음정이나 박자를 잘 못 맞추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엉터리라고 누가 잡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잘 부르는 노래는 CD나 TV를 통해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어떤 글이든 단어를 정확하고 적절하게 골라 써야 하지만 그게 자신이 없다고 글쓰기를 주저하는 건 더 좋지 않다. 요즘에는 대부분 컴퓨터로 글을 쓰는데 웬만한 잘못은 그 영특한 기계가 빨간 밑줄을 그어서 바로잡아준다. 그러니 일단 쓰기부터 하자. 쓰지 않고 망설이거나 쓰기를 포기하면 내가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단어가 무엇인지조차 영원히 알 길이 없다. 그것 때문에 쓰지 않으면 영원히 못 쓴다.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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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8 23:02

【⑨매우 굵어서 자랑하고 싶은 내 팔뚝】자화자찬·비난·찬양 일변도는 절제해야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거나 다툼이 벌어질 경우 상대방이 지나치게 잘난 체를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가며 자기주장만 고집할 때, 그래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그래, 니 똥 굵다." "우리 그이가 이번에 승진을 했잖니. 함께 입사한 직원이 백이십 명인가 된다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과장을 달았다고 하더라니까, 글쎄? 어디 그뿐인 줄 아니? 우리 큰애, 걔가 맨날 2등 아니면 3등이더니 이번에 드디어 전교 일등을 했다는 거 아니니. 내가 이거 졸지에 양쪽으로 축하 턱을 내야게 생겼으니 이래저래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이다, 얘. 난 이 노릇을 도대체 어쩌면 좋으니?" 이 여자는 겉으로는 엄살을 피우면서 사실은 남편 자랑과 자식 자랑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이런 걸 두고 우리 지역 사람들은 '야냥개를 떤다'고 한다.). 어차피 작정을 하고 자랑을 하고 있으니 듣는 사람 기분 따위는 '그까이꺼'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이들일수록 낯부끄러운 줄도 모른다."어휴, 내가 못살아!""왜, 또?"나는 형자의 다음 말이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아, 글쎄 이 인간이 나 몰래 주식에다 돈을 얼마나 꼴아박았는지.""저런.""그뿐이면 내가 말도 안 해. 아무래도 이 인간이 좀 수상해.""수상해? 그렇다면 혹시."이 경우는 어떤가. 친구가 들려주는 '이 인간(남편)'의 이야기에 '나'의 귀가 솔깃해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그가 늘어놓는 자랑거리는 귀에 거슬리고,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이야기에는 저절로 귀가 솔깃해지는 이 뒤틀린 심사를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런데 글을 쓰고 읽는 것도 이와 거의 같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자신과 가까운 이(남편, 아내, 아들이나 딸, 형제자매 중 누군가)를 자랑하는 글을 주변에서 가끔 발견하게 되는데,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쓸 시간이 남아돌거든 자랑거리가 주체할 수 없도록 넘쳐나는 가족끼리 지금보다 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데 모든 정열을 바칠 일이다. △자화자찬의 성찬 대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각오한 바도 있었지만 석사과정 공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지독했다. 한 과목 보고서로 A4지 500장을, 그것도 거의 논문 수준으로 써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서가에 빽빽이 꽂힌 책들을 보면서 매 학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보람 있게 보냈다. 그 바람에 건강을 많이 상하기도 했고, 나는 결국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독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교수가 되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지금 와서 돌이켜보아도 참 아득하기만 한 시절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렇게 잘났으니 좀 알아달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사람은 뻥을 치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이 사람이 대학원에 다니면서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했는지 읽는 이는 물론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원 석사과정(설령 박사과정이라 해도)을 다니는 학생이 한 과목 보고서로 A4 용지 500장씩이나, 그것도 '거의 논문 수준으로' 써냈다는 걸 믿으려면 누구를 막론하고 상당한 인내가 필요할 듯싶다. 두 과목을 수강했으면 A4 천 장을 썼다는 건데, 그건 책 열 권 분량이다. 대학원은 자기만 다닌 게 아니지 않은가. '서가에 빽빽이 꽂힌 책들'을 위안삼아 그 '지독한' 시절을 보냈다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너그럽게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또 뭐라고 썼는가. 그 시절에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독한 병'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교수님의 시험문제는 강의보다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이미 강의를 받는 동안 교수님께서 출제하실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10년이 넘도록 그때 보았던 문제들을 마치 손에 들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후배들은 그 교수님 과목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을 앞두고 내게 문제를 앞다퉈 물어오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복원해주었다. 읽는 사람 기분도 생각해가면서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강의내용보다 훨씬 어려운 시험문제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죽을 쑤는데 자신은 그걸 매번 꿰뚫어보았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일찍이 오래고 고된 수련을 거쳐서 독심술 같은 거라도 연마했을지도 모른다. 졸업한 지 10년이 넘도록 대학 다닐 때 출제되었던 문제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이 꿰고 있다고도 했다. 그 적잖은 세월을 두고 매 학기 똑같은 문제만 출제하는 교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런 말을 함부로 썼다가 자칫 잘못하면 그 교수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물론 자신의 장점이나 업적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 인지상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는 읽는 이를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단점은 있다. 자신이 행한 일중에서 혹시라도 누가 알게 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그걸 솔직하게 드러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힘들게 살았던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자신 앞에 닥쳐온 고난과 역경을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했는지 쓰는 것은 좋지만 이 또한 읽는 이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자신의 장점이나 자랑하고 싶은 '빛나는 업적'에 대해 글로 쓰고 싶어서 정 견딜 수가 없으면 꾹 참고 있다가 집에 들어가서 새벽이 밝아오도록 일기장에나 실컷 쓸 일이다(사실은 일기에조차 그런 걸 쓰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런 다음 한 일 년쯤 묵혀두었다가 그 일기장을 꺼내 다시 읽어보도록 하라.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낯이 화끈 달아오를지도 모른다.△비난하거나 찬양하기 납득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이나 즉흥적 기분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데 열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를 알아달라는 건데 그래 봐야 속만 빤히 들여다보인다. 정작 민망하고 딱한 쪽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도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그가 못마땅하면 불러내서 면전에 대고 일침을 가하거나 비판을 하는 게 옳다. 또 그가 내게 한 어떤 행동에 정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거든 당장 달려가서 멱살을 붙잡고 코피가 터지도록 싸울지언정 그걸 글로 써서 함부로 발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글로 쓰지 말아야 할 것은 또 있다. 바로 '용비어천가' 같은 글이다. 그렇게 완벽한 인격의 소유자를 평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느니, 21세기에 새롭게 태어나신 신사임당 같은 그 분에게는 평생을 두고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전해드려도 모자랄 것 같다느니, 그토록 훌륭한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었던 건 제자들 모두의 크나큰 행운이었다느니 하는 찬양 일색의 글은 읽는 이뿐 아니라 찬양을 받는 당사자까지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 '절제의 미덕'이야말로 글 쓰는 이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인 것이다.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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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21 23:02

8. 타락한 세상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혼사장애 모티프 1970년대에 전 세계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가 있었다. 원작은 에릭 시걸의 소설인데, 그 첫머리는 주인공 올리버가 사랑하는 아내 제니를 떠나보낸 뒤 이렇게 독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스물다섯 살에 죽은 여자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총명했다. 그녀는 모차르트와 바흐를 사랑했다. 비틀즈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를 사랑했다.〈춘향전〉의 몽룡이와 춘향이도 몽룡의 아버지가 한양으로 갑자기 '전근'을 가는 바람에 평생 변치 말자고 사랑의 굳은 맹세를 했던 그 어린 것들이 더 이상 붙어 있지 못하고 오리정에서 피울음을 쏟으며 작별하지 않았는가. '혼사장애(婚事障碍) 모티프(motif)'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혼사(혼인/결혼)를 가로막는 동기 혹은 요인'을 뜻한다. 남녀의 사랑을 가로막거나 지속할 수 없도록 하는 유형과 무형의 원인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이념의 차이로 남북으로 갈라진 동족간에 벌어진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배를 타고 제3국으로 가는 도중 바다로 뛰어내려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명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자신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혼사장애 요인의 벽 앞에서 작중의 남녀는 고난을 겪는다. 방황하기도 하고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순수와 타락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소설이 있다. 작중의 주인공인 베르테르는 샤롯데를 사랑했지만 당대의 인습체제와 귀족사회의 통념에 가로막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한다. 〈소나기〉나 〈러브스토리〉처럼 운명적인 요인을 제외하면 춘향이와 몽룡, 이명준과 두 여인(윤애와 은혜), 베르테르와 샤롯데의 사랑을 가로막은 혼사장애 요인은 모두 인간이다. 구체적으로는 그런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타락한 세상이다. '타락'은 무엇이고, '순수'는 또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과연 우리는 순수한가, 타락했는가. 나는 과연 순수한 사람인가 아니면 타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는 순수하지만/순수했지만 어쩔 수 없이 타락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처음에는 순수했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잘 몰랐을 때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다만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변했을 뿐이다. 남녀의 사랑은 중요한 글감 중 하나다. 유사 이래 영원한 글감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녀의 사랑을 다룬 글을 읽을 경우 그 글의 주제는 거의 대부분 혼사장애 요인에 있다. 남녀의 사랑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도록 가로막는 '그 무엇'이 바로 주제라는 말이다. 〈춘향전〉이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제는 당대의 비인간적 신분사회의 모순을 드러내자는 것이 되고, 최인훈의 〈광장〉 또한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적 요소의 고발이 되는 것이다.주말연속극 같은 멜로드라마의 경우 서로 사랑에 빠진 남녀는 그들 앞에 아무리 극복하기 어려운 혼사장애 요인이 버티고 있다 해도 종국에는 그걸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다(그 과정이 납득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그걸 '막장' 드라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멜로드라마 얘기다. 우리가 써야 하는 글은 다르다. 글을 쓸 때는 혼사장애 요인을 통한 주제 찾기와 반대로 간다. 글에서 그려야 하는 이야기는 성공한 사랑이 아니고 앞서 보았던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실패한 사랑이다. 혹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모두 타락한 세상 탓이다. △실패한 사랑 이야기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글을 쓰고 싶어서 글감을 찾고 있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글감은 가까운 데서 찾으라고 했으니 먼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하자. 연애에 실패한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그녀와의 사랑을 지속하지 못했는지 당시의 여러 전후사정을 곱씹어가며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얘깃거리가 될 만한 게 없는가. 초등학교 때 첫사랑인 그/그녀와 결혼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어서 그런가(이런 사람은 어쩌면 좋은 글을 쓰기가 대단히 어려울지도 모른다.). 주변에서도 찾아보자. 그 대신 남녀 어느 한쪽이 백혈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느니,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양쪽 집안 내력을 하나하나 파고들어가다 보니 서로 죽고 못 사는 두 사람이 배가 다르거나 씨가 다른 남매로 판명이 나서 천륜을 어기지 못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느니, 양쪽 집안의 빈부차가 하도 심해서 남자나 여자 쪽 부모가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느니 하는 진부하고 통속적인 이야기 따위에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관심을 주어서는 안 된다. 기웃거리거나 근처를 얼씬거리는 것조차 삼가야 한다. 집안의 어른들뿐 아니라 가까운 형제나 사촌들 중에서 멀거나 가까운 과거에 지독하게 사랑하던 사람과 아프게 헤어진 이들은 없는지, 그들은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했는지 알아보자. 학교 선후배나 직장의 동료들, 한 동네나 이웃 마을에 사는 아무개와 아무개들의 실패한 연애담에도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물론 유명 연예인들의 이혼담 같은 통속적 사건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다. 인터넷을 뒤져서 그 이면에 가려진 진실을 샅샅이 뒤져보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기꺼이 눈길을 주도록 하자. 세상이 얼마나 어떻게 타락했는지, 그처럼 타락한 세상은 또 어떤 혼사장애 요인을 몰래 숨기고 있는지 발굴해내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도 무방하고, 사회적인 요인을 찾아내는 것도 좋다. 불의의 큰 부상을 당했거나 성적부진으로 소속 구단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놓인 야구선수와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사랑 이야기를 무게감 있게 쓰기 위해서는 우리 현대사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동족간의 끔찍한 전쟁을 치렀다. 학생혁명이나 군사쿠데타와 같은 굵직굵직한 정치사회적 사건을 목도하며 변혁의 소용돌이를 헤쳐왔다. 그 과정에서 뜻있는 많은 이들은 위정자들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가 잔혹한 고문을 당한 이들도 부지기수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스스로 온몸에 불을 사르고 처참하게 죽어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들의 가려진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들 중 누군가의 애인이나 아내가 되어 보고, 남자친구나 남편도 되어 보자.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지를 맘껏 상상하는 것이다. 그들이 겪었을 고통은 또 어떤 것들이 있었을 것인지도 당신이 직접 겪은 것처럼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려보지 못했던 글감을 캐내거나 포획했으면 그걸 글감으로 사랑 이야기를 만들자. 아무리 순수한 사랑도 세상이 타락해 있는 한 그리 오래갈 수 없고, 종국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되고 만다. 그게 바로 당신이 글 속에서 그려야 하는 타락한 세상 속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이다.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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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14 23:02

7. 항상 외롭고 쓸쓸하기만 한 당신

△고독 혹은 쓸쓸함 누구나 지축 위에홀로 서 있나니햇살 한 줄기 뻗쳤는가 하면어느덧 황혼이 깃든다살바토레 콰시모도, 〈황혼이 깃들고〉 전문우리들 각자는 세상의 지축/중심에 서 있으되, 이처럼 '누구나' 항상 '홀로 서 있'다. 어디 그뿐인가. 햇살이 머무는 시간은 언제나 짧고, 어느덧 깃드는 황혼처럼 우리의 삶/인생 또한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느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새근새근 잘 자던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자지러지게 터트린다. 장난감 가게에서 유치원생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고, 남루한 옷차림의 엄마는 철없는 아들에게 망연한 눈길을 주다 말고 한숨을 푹푹 내쉰다. 중간고사가 있는 날인데 시험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아서 학교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무엇 때문에 자지러지게 울고, 떼를 쓰고, 한숨을 쉬며, 발걸음이 무거운가.짝사랑하던 국어선생님의 결혼 소식을 듣고 사흘이나 무단결석을 한다.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걸 발견하고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린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다. 사업실패를 비관한 남자가 한강다리에서 몸을 던진다. 자, 또 묻는다. 무엇 때문에 무단결석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광장에 모이고, 한강에 몸을 던지는 것인가.외로워서다. 앞서 예를 든 갖가지 행동을 하게 만든 원인으로서 그 '무엇'을 하나로 묶는 말이 바로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서 울고, 깊은 한숨을 쉬며, 외로워서 슬픔에 잠긴다. 때로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자신을 외롭게 만든 그 어떤 것에 온몸으로 항거하기도 한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 또한 외로움이 극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도대체 '외로움'은 무엇인가. '외로움'이란 본디 '홀로 있는 듯이 쓸쓸한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홀로 있다니, 사람이란 본디 홀로인 존재 아닌가. 그렇다. 사람이란 늘 혼자여서 고독한 존재다. 곁에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도 우리는 결국 누구나 혼자고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외로움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이 '외로움'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나다. '나' 자신이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물론 소중하지만 '나'보다 더할 수는 없다(그들은 어디까지나 '나'가 소중하게 인지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디 그런가. 심지어 '나'가 당장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만 돌아간다. 결국 '나'가 제일 소중하므로 세상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나'가 성취하려는 것들도 모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 속에 있다. 그런데 아무리 간절히 소망하면서 발버둥을 쳐도 '나'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바라는 만큼에 턱없이 모자란다. 당연하다. 세상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나'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대와 달리 '나'는 세상의 중심에 있지도 않고, 세상과 하나일 수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 '나'와 세상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인식 혹은 그렇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외로움'이고 '고독'인 것이다. 그건 각자의 낭만적 바람과 사실적 좌절의 괴리에서 비롯된 감정의 일종이기도 하다. '낭만'과 '사실'은 무엇인가. 비유컨대 '낭만'이 술꾼들의 저녁 술자리를 지배한다면 '사실'은 다음날 으레 닥쳐오게 마련인 신체와 정신의 고통 같은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러므로 '사실'은 모든 외로움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비교해보자. 친구든 선후배든 죽이 잘 맞아 돌아가는 이들과 어울려 차수와 주종을 바꿔가며 새벽이 당도하도록 부어라 마셔라 한다. 과음으로 건강이 나빠진다든가,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는다고 부아가 난 마누라의 배배 꼬인 심사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다음날 첫 시간 강의가 있다는 것쯤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마셔서 즐거운 개인의 감정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둥실둥실 떠다닌다. 바로 낭만적 철없음의 시간이다. 전날의 숙취 때문에 속이 쓰리고 둔기에 찍힌 듯 뒷골이 쩍쩍 갈라지는 사실적 고통의 시간이 바야흐로 도래한다. 그놈의 술 때문에 내가 못 살아, 못 살아를 연발하는 마누라의 잔소리는 숙취의 고통에 염장을 지른다. 결국 첫 시간 강의를 휴강 처리한 일로 술꾼의 착하디착한 심기는 두통보다 더하다. 어젯밤의 그 자유분방했던 상상의 날개는 맥없이 꺾인다. 급기야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성을 바꾼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사실적 아픔과 후회의 시간이다. 세상이 낭만적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나를 외롭게 만드는 '사실'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살아 있는 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아픈 삶의 무게'외로움'은 장르를 막론하고 모든 예술 분야의 핵심이 되는 주제다. 예술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게 사람의 삶인데, 이 외로움이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크든 작든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지내는 날이 하루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외로움에 때로는 맞서 싸우기도 하고, 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고민도 하고, 또 때로는/대부분의 경우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그걸 순순히 받아들인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박인환은 그의 〈목마와 숙녀〉에서 읊조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쓸쓸한 인생이고 사람살이인 것이다. 물론 이 외로움의 감정은 미래의 방향을 정해주어서 하루하루 고단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기도 한다. 이 경우 각자 느끼는 외로움이 지독할수록 삶의 방향도 확고해진다.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감을 찾아내는 좋은 방법이 여기 있다. 우선 과거에 나를 외롭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요즘 나를 외롭게 만드는 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사람이든 주어진 현실이든 뭐든 나를 힘들게/외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글감이 되고 주제도 된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제를 먼저 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글에서 주제는 전체 이야기를 통일성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고 주제를 앞세우면 글쓰기는 시작조차 어렵다. 거기에 딱 들어맞는 글감을 찾기가 어려워서다. 그렇게 쓴 글은 억지로 짜 맞춘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다. 이제부터는 글감이 될 만한 이야기부터 찾아보자. 바로 '나를 외롭게 하는 것들'이다. 지금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들, 나를 힘겹게 만드는 것들, 내가 불만을 갖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첫눈이 펑펑 쏟아져서 친구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남자친구와 약속이 있다면서 다음에 만나자고 하지 않았는가. 새벽에 일어나 밥상을 차렸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입맛이 없다며 밥숟가락을 드는 둥 마는 둥하고 집을 나갔는가. 그래서 기분을 잡쳤고 또 속이 부글부글 끓는가. 그걸 쓰면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만의 삶의 모습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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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07 23:02

6. 나만의눈으로 관찰하고 음미한다

△이별소중한 사랑리별은 美의創造입니다 / 리별의 美는 아츰의 바탕(質)업는 黃金과 밤의 올(絲)업는 검은비단과 죽엄업는 永遠의生命과 시들지안는 하늘의 푸른꼿에도 업습니다 / 님이어 리별이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엇다가 우슴에서 다시사러날 수가 업습니다 오오 리별이어 / 美는 리별의創造입니다 (한용운, 〈리별은 美의創造〉 전문)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세상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별'이란다. 창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야말로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미 그 이상이란다. 아름다움 그 자체이고, 목숨처럼 소중하단다.이별이 슬프지 않고 아름답다니, 게다가 목숨처럼 소중하다니, 이건 또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 시를 읽는 맛은 그런 데서 시작된다. 만해는 '이별'을 '깨달음의 원천'으로 보았다. 곁에 있을 때는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는데 그걸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이별라고 본 것이다. 어떤 대상이든 사건이든 관념이든 이처럼 독창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쓴 글이어야 읽는 이에게 새로운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 누구의 눈에나 그렇게 보이는 건 글의 내용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다.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선생님들의 열성적인 가르침으로 그동안 훌륭한 선배들도 많이 배출했다. 그 선배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 학교는 교장 선생님 이하 많은 선생님들께서 학생지도에 열과 성을 다하고 계신다. 재학생 모두는 우리 학교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아 저마다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를 소개하고 있는 이 글은 과연 읽을 만한가. 어쩌면 고개가 저절로 갸웃거려질지도 모른다. 이 글의 내용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에 자긍심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부모선생님친구 어느 백일장에서 '소중한 사람'이라는 글감이 주어졌다. 자, 이제 글을 쓰려면 당연히 자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지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니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 많은 지식을 주시고 내가 엇나가지 않도록 관심을 갖고 타일러주신 선생님, 부모님이나 선생님 대신 함께 고민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던 친구들의 모습이 차례로 떠오른다. 그래서 이 셋을 모두 쓰기로 하고, 우선 부모님에 대해 이렇게 썼다.누구나 똑같겠지만 내 부모님은 나를 애지중지하시면서 키우셨다. 내가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셨고, 말도 안 되는 고민도 다 들어주셨다. 중학교 때 사춘기가 찾아와서 내가 짜증을 부릴 때도 엄마와 아빠는 약속이나 하신 듯 웃음으로 넘기시며 우리 딸이 그래도 최고라고 말씀해주시곤 했다. 부모님은 지금도 나를 걱정하시는 마음이 지극하시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오늘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자, 어떤가. 이 글을 읽어서 새롭게 얻을 만한 것이 과연 있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까닭은 이렇다. 세상에 자식을 애지중지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자식 걱정 안 하는 부모는 세상에 또 어디 있으며,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마음먹는 거야 자식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하긴 맨 앞에 '누구나 똑같겠지만'이라고 쓰긴 했다.읽는 이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글감/제목을 대하는 순간 이 글을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앞서 본 글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에서 별로 벗어난 게 없는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쓴 어느 여고생의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날 '나'는 선생님과 함께 근처의 보육시설로 봉사활동을 갔다가 그곳에 사는 '오빠' 한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런데 '나'가 눈길을 몇 번이나 주었는데도 그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수행평가 점수 때문에 일주일 뒤 그곳을 또 방문하게 된다. 그제야 '나'는 그 '오빠'가 청맹과니(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눈/사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빠'를 오해해서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그 오빠에게 다가가 그와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앞을 전혀 못 보는데도 세상을 향한 '오빠'의 마음의 눈은 '나'보다 훨씬 밝았던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렇게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오빠의 말에 '나'는 온갖 불만투성이로 살고 있는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된다. '나'로 하여금 세상을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그 '오빠'야말로 요즘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내용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체험을 살려 쓴 글이다. '청맹과니 오빠'라는 글감도 잘 끌어들였다. 자신의 순간적인 실수와 요즘 자신의 생활상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도 돋보인다. 무엇보다 '오빠'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작중화자의 마음이 읽는 이들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독창적 생각과 느낌 대상이나 이야기를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글에서 써야 하는 것은 내가 겪은 것 자체가 아니라 내가 겪었으되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나만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소중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때 '부모님', '선생님', '친구' 모두 사실은 훌륭한 글감이 될 수 있다. 적어도 누구나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관점에서의 그들이 아니라면 그렇다. '나'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본 부모님의 특수한 처지나 상황 혹은 나와의 관계, 소설 〈완득이〉의 담임 '똥주'와 같이 상식에서 벗어난 어떤 선생님의 독특한 교육방식이나 철학 등을 발견해서 쓰라는 말이다. 사실 모든 글쓰기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살아왔고 살아가며 보내는 시간과 시간들의 모든 경험은 글감이 될 수 있다. 앞서 글감을 가까운 곳에서 찾으라고 했던 것도 그런 뜻에서다. 물론 여러 가지 일을 많이 체험하면 그만큼 많은 글감이 내면에 쌓이는 건 사실이다.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기구하게 살아왔다면 그 자체가 좋은 글감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게 모두 글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 체험에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이나 느낌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는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 중 아무리 사소하고 초라하며 남루한 사물이나 사건이라도 있는 그대로만 바라보지는 말자. 거기에 가끔은 삐딱한 눈길과 배배꼬인 마음길을 주기도 하자. 그걸 함부로 뒤집어도 보고, 세워도 보고, 엎어놓고도 보자.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다음 달달 볶으면서도 보기를 멈추지 말자. 그러면 예기치 않은 데서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과 느낌이 정월 대보름달처럼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걸 글감으로 포획하자.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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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31 23:02

5. 그 작고 초라하며 남루한 것들

△눈길과 마음길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이상국, 〈어둠〉 전문나무가 베어지기 전까지 뿌리는 줄기와 가지와 잎을 통해서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게 한꺼번에 잘려나가자 뿌리는 세상과 연결된 통로를 차단당한 채 캄캄한 어둠 속에 고립되고 만다. 이렇듯 작고 하찮은 나무뿌리에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시인은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시인은 아마 어느 산길을 걷다가 밑동이 잘려나간 나무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던 시인의 눈길과 마음길이 땅속 깊이 박혀 있는 뿌리에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이 시는 그러므로 잘려나간 나무의 뿌리처럼 작고 초라한 것에 관심을 가져서 얻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 독립영화가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팔순 농부와 30년을 함께해 온 늙은 소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연출자는 세상 누구도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농부와 소의 일상에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춰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린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글감을 구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들에 눈길과 마음길을 주는 것이다. 앞서 보았던 〈어둠〉의 땅속에 박혀 있는 나무뿌리나, 〈워낭소리〉의 농부와 소처럼 작고 초라하며 남루하기까지 한 대상이나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안도현 시인의 눈길과 마음길은 작고 초라한 것들 중 골목길에 함부로 버려진 연탄재로 향한다.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그의 시 〈너에게 묻는다〉 전문이다. 남들한테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어본 적이 없다면, 내가 가진 것을 남을 위해 흔쾌히 그야말로 아무 조건 없이 내준 적이 없다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는 게 이 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초라하고 남루한 연탄재를 따뜻하게 바라볼 줄 아는 시인의 눈길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를 쓸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연탄재'처럼 작고 하찮은 것들이 그야말로 수두룩하다. 사실 그런 건 누구의 눈에든 보인다. 하지만 자신만의 눈으로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고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걸 글감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우선 아무리 작고 초라하고 남루한 것일지라도 '함부로 발로 차지' 말아야 한다. 그것에 관심을 갖고 애정어린 눈길과 마음길을 주어야 한다. 사실 이 '관심'은 우리의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각자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내는 다양한 성취의 모든 출발점이기도 하다. 어째서 그런가. 수많은 이성 중 한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연애도 시작된다. 앞선 〈너에게 묻는다〉도 사실은 함부로 버려진 연탄재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지 않은가. 관심을 가져야 공부도 하고, 누군가에게 연애도 걸고, 돈도 벌고, 여행도 떠나고, 다이어트를 해서 몸매를 날씬하게 가꾸기도 하고, SNS로 친구들과 대화도 나누고, 글도 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관심 자체는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이성 중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겼으면 그/그녀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본 다음 자신의 불타는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전달해야 연애도 시작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 버려진 연탄재를 아무 생각없이 뚫어지게 쳐다만 본다고 〈너에게 묻는다〉와 같은 시가 저절로 써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 △다가가서 들여다보기좋은 글을 쓰려면 아무리 작고 초라하며 남루한 사물이나 현상이나 사건이라도 성실하고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 내 마음을 투영해서 대상과 끊임없이 교감하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관계되는 책도 읽어보고, 그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도 들어보고,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하는 번거로움도 기꺼이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해가 저물고 있는 한겨울 어느 항구를 떠올려보라. 멀리서 바라본 항구의 모습은 풍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왜 아니겠는가.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라. 어디 그렇기만 한가. 우선 항구 특유의 짠 내음과 바닷물에 뒤섞인 기름 냄새가 코에 끼쳐온다. 여기저기 함부로 버려진 어구(漁具)들은 눈살을 찌푸리게까지 한다. 오랜 세월 거친 바닷바람에 시달려 온 어부들의 뺨과 손등도 제 빛깔을 잃고 쩍쩍 갈라져 있지 않은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글감으로 한 편의 글을 쓰려면 멀리서 관조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작고 하찮고 초라한 것일수록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그 실제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글은 사랑하는 그이와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멀리 보이는 항구를 한가롭게 관상하는 낭만적 세계가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꼼꼼히 들여다봐야 하는 사실적 세계가 바로 글인 것이다. 자, 이제 그 작고 초라하며 남루한 것들 중 하나를 골라서 글을 쓰려고 한다. 글감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다 문득 앞서 읽었던 〈너에게 묻는다〉가 떠오른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도 '연탄재'를 글감으로 한 편의 수필을 쓰기로 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펜을 들거나 컴퓨터를 켜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먼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버려진 연탄재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걸 오래 바라보자. 멀찍이 떨어져서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도 보자. 연탄재 하나를 따로 놓고도 보고, 무리지어 층층이 쌓아놓은 것도 눈여겨보도록 하자. 구멍의 개수도 세어보고, 그 기능에 대해서도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자. 손으로 직접 만져도 보고, 들어올렸다가 바닥에 떨어뜨려서 깨지는 모양도 보고, 〈너에게 묻는다〉를 떠올리며 그걸 함부로 발로 힘껏 걷어차서 한번쯤은 그 기분을 직접 느껴보자. 연탄 공장에도 가보고, 새 연탄에 불을 지펴도 보고, 아궁이 속의 연탄을 갈아보는 일도 해보자. 연탄불에 라면도 끓여서 먹어보고, 거기에 구운 오징어는 가스 불에 구운 것과 맛이 어떻게 다른지도 음미해 보자. 물론 달동네 어느 집에 연탄배달을 직접 해보는 것도 연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그런 다음 연탄재를 속으로 곱씹는 일을 반복해본다. 그러면 함부로 버려진 연탄재에 대해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앞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그걸 쓰는 것이다.글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담아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렇듯 글을 쓰려면 작고 초라하며 남루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쓰라린 실패, 이루지 못한 사랑에 눈길과 마음길을 던져야 한다. 주위의 춥고 배고픈 일상으로 눈길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 누구나 눈길을 보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어 가려지고 숨겨진 것에 애정을 보낼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삶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려고 펜을 든 순간 내게 행복했던 기억, 기쁨과 환희의 시간, 가슴 벅차도록 자랑스러웠던 경험들은 접어두자. 내가 겪었던 아무리 화려하고 가슴 벅찼던 행복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인물의 경우도 그의 화려한 외면보다는 그가 겪어왔던 숱한 실패담에 사람들은 관심을 더 갖지 않던가. 실연의 아픔을 달래느라 눈발이 함부로 날아드는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에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는 젊은 남자의 속울음 같은 것이 바로 글임을 잊지 말자.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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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24 23:02

4. 글감은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다

목련꽃 목련꽃 / 예쁘단대도 / 시방 /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 목련송이만할까 / 고 가시내 /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 내 다 알지 /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 눈부신 / 하냥 눈부신 / 저(복효근, 〈목련꽃 브라자〉 전문)사춘기로 접어든 딸아이의 신체 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비의 눈길이 참으로 정겹다. 아비는 어느날 마당의 빨랫줄에 걸린 딸아이의 '브라자'를 발견하고 그 아이의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를 연상한다. 읽는 이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덥혀주는 예쁘고 '하냥 눈부신' 한 편의 시는 거기, 그렇게 가까운 마당의 빨랫줄과 그보다 더 가까운 시인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감은 이 시인처럼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찾는 것이 가장 좋다. 모든 글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는 것인데,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일수록 그런 체험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체험 아는 건 쉽고 모르는 건 뭐든 어렵다. 이건 불변의 진리다. 평생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사람이 술꾼들의 애끓는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생각과 느낌을 문자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다. 글감은 당연히 생각과 느낌을 갖게 한 그 어떤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 어떤 것'은 바로 자신이 직접 체험한 걸 가리킨다. 체험은 사람을 사람답게 변화시키는 힘이다. 어린아이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것은 세상살이의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 많은 지식을 축적해서 세상물정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체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간접체험과 직접체험이다.간접체험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를 통해 아프리카 오지를 여행할 수 있다. 심장병으로 죽어가는 연인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흉부외과 의사의 삶도 대신 살아볼 수 있다. 특히 독서는 많은 지식과 다양한 느낌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간접체험 방식이다. 직접체험은 살아가는 동안 몸으로 직접 부딪치고, 겪고, 보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들 대부분은 직접체험을 통해 얻어진다. 직접체험은 하루하루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여행도 뺄 수 없다. 여행은 평소 흔히 접할 수 없는 세계로 가서 새로운 것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니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체험으로 여행만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또한 우리에게 좋은 글감을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체험이 곧바로 글이 되는 건 물론 아니다. 직접 부딪쳐가며 생생하게 체험한 일들을 어떻게 하면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누구의 눈에나 보이는 것들 중 하나를 골라서 자신의 체험과 어떻게 연관 지어 글로 쓸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바로 이 아이처럼.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린다. 갑자기 작은이모가 보고 싶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아이가 쓴 동시다. '그리움'이라는 제목으로 쓴 이 글은 보다시피 단 두 줄짜리다. 이 동시에는 아이의 두 가지 체험이 들어 있다. 하나는 어느 봄날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읽는 이로서는 도무지 그게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 작은이모와 함께했던 시간의 체험이다.아이는 자신이 겪은 이 두 가지 직접체험을 글감으로 한 편의 동시를 쓴 것이다. 물론 이 아이와 똑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두 행에 들어 있는 서로 다른 체험을 인과관계로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것하고, 작은이모가 갑자기/뜬금없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이 이 글을 읽는 묘미를 더해준다. 사실 그건 글을 쓴 아이만 아는 일이다. 읽는 이는 그걸 몰라도 된다(아니 어쩌면 모르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던 과거 어느날 아이는 작은이모의 손을 잡고 소풍을 재미있게 다녀왔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을 몹시 귀여워했던 작은이모를 무덤에 묻고 펑펑 울면서 돌아오는 길에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장면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 동시를 읽는 이는 이런 상상을 함으로써 두 행을 인과관계로 연결한다. 물론 그런 상상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할수록 읽는 맛이 더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속사정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작은이모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아이의 애달픈 마음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시를 쓴 아이처럼 글은 자신이 겪은 걸 쓰는 데서 시작한다. 그것도 자주 겪어서 잘 아는 것부터 쓰는 것이 좋다. 그런 이야기일수록 쓰기도 쉽다. 우리는 자신이 겪은 건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겪은 것은 모두 나만의 소중하고 특별한 체험이라고 믿으라는 말이다. 남들이 체험한 건 자신이 직접 겪었거나 눈으로 본 것만큼 생생하게 쓰기가 어렵다. 또 책을 읽어서 얻은 지식이나 지혜를 글로 곧바로 옮겨 쓰면 자칫 현학적인 허영의 늪에서 빠질 수도 있다. 사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게 될 우려도 있다. 특히 글쓰기의 초보 단계에 있는 이들일수록 이런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렇게 쓴 이야기는 사실감이 떨어져서 읽는 이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온몸을 실컷 두들겨 맞은 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싶어서 글을 쓰다 말고 밤거리로 나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기도 했다는 어느 작가의 회고담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깨에서 힘 빼기글감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글감을 찾는다고 남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의 주위만 맴도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역만리 낯선 곳을 헤매는 건 더 어리석다. 거창한 글감을 찾아서 내가 쓰는 글에 온갖 세상사를 한꺼번에 쓸어담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주머니 속에 항상 넣고 다니는 스마트폰도,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놓은 포스트잇 한 장과 거기 적힌 짧은 메모도, 거의 매일 얼굴을 대하는 부모와 형제도 훌륭한 글감이다. 좋은 글을 쓸지 여부는 자신이 겪은 일을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돌아보고 생각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냐에 있지 글감 자체를 얼마나 거창한 것으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깨에서 힘을 빼라는 말이 있다. 글쓰기도 같다. 글재주가 영 신통치 않아서 글을 못 쓰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감을 찾지 못해서 헤맨다. 도대체 어떤 걸로 글을 써야 될지 모르겠다거나 자신의 삶 속에는 글로 쓸 만한 것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이들도 있다. 왜들 그러는 걸까. 무엇 때문에 그럴싸한 얘깃거리만 골라서 폼나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줄 수 있는 거창한 글감을 찾아서 멋들어진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는 한 글쓰기는 시작조차 하기 어렵다는 걸 잊지 말자. 설령 어찌어찌 쓴다 해도 좋은 '작품'을 쓰기는 애당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것만 쓰기에도 원고지 칸은 모자라고 컴퓨터 모니터는 좁다고 굳게 믿자. 더구나 나는 지금도 나만의 체험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지 않은가. 그런 걸 써야 하는데 자꾸 먼 곳에서만 글감을 구하려 들기 때문에 글쓰기가 시작 단계부터 삐걱대는 것이다.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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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7 23:02

3. 파내듯 읽기와 베껴 쓰기의 힘

△글을 쓰는 이유와 방법 친구 따라 강남 가고, 갓 쓰고 장보러 간다 했던가. 고등학교 3년간 함께 마신 술로 우정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학생이 있었다. 막상 들어가 보니 학과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더란다. 저마다 소설이니 시니 드라마니를 쓰겠다고 눈빛을 반짝이는데, 정작 자신은 어릴 때 일기숙제 말고는 글이라는 걸 써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할 수밖에. 그러던 어느날 그는 우연히 안도현 시인의 습작기를 회고한 글을 읽게 된다. 나는 백석의 새로운 시를 만날 때마다 노트에 한 편 두 편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묘한 흥분과 감격에 휩싸여 손끝은 떨리고 이마는 뜨거워졌다.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그런 필사의 시간이 없었다면 내게 백석은 그저 하고많은 시인 중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그건 짝사랑이었지만 행복했다.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부분)남의 글을 노트에 베껴 쓰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그래도 유명한 작가의 경험담이니 순전히 뻥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는 한 번 속는 셈 치기로 했다.그는 우선 문학잡지에 발표된 단편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작품은 한두 편 있었다. 그걸 밤을 새워가며 손목이 아프도록 노트에 옮겨 쓰기 시작했다. 한 학기 동안 그가 읽은 단편소설이 무려 오백 편에 이르렀다. 노트에 필사한 소설도 자그마치 백 편에 달했다. 직접 창작한 글이 아닌데도 그동안 자신이 베껴 쓴 노트는 쳐다보기만 해도 왠지 뿌듯해지는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쯤 되고 보니 소설을 읽는 눈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더란다. 좋은 소설과 그렇지 않은 것도 분별할 수 있는 안목도 갖게 되더란다. 아, 소설이란 게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구나, 하는 소설작법에도 눈이 차츰 뜨이더라는 것이었다. △필사의 효능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글이다. 어째서 그런가. 글이란 본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문자언어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관건은 '생각과 느낌', '문자언어 사용능력', '표현욕구' 이 세 가지를 하나로 결합하는 행동을 하느냐 마느냐다. 앞서 보았던 사례는 두 가지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하나는, 어쩌면 '그'가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고, 굳이 뭘 써야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술만 퍼마시고 다녔던 것이다(아, 술도 누구와 어떻게 퍼마시느냐에 따라 글쓰기에 엄청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다음으로는 글쓰기 연습 단계에서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을 베껴 쓰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보았던 안도현 시인의 경험담은 비단 시뿐 아니라 소설, 수필, 공문서, 보고서, 자기소개서 등의 글쓰기를 시작하려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물론 몇 편 베껴 써본다고 당장 글이 저절로 써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모방 흉내따라하기화실에 가면 반드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아리아스 등의 이름을 가진 하얀 석고상들이다. 회화나 디자인 같은 미술 영역에 뛰어든 이들은 기초 단계에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석고 데생을 부지런히 연습한다. 스페인 태생의 입체파 화가인 저 유명한 피카소의 그림들을 떠올려 보라. 이게 무슨 유명 화가의 그림일까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어떤 작품은 초등학생도 얼마든지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혹시 알고 있는가, 그의 데생 작품은 실물과 완벽에 가까울 만큼 흡사했다는 사실을.노래에 자신이 없는 이들도 가수들이 부른 노래를 한 대목씩 나눠서 지속적으로 흉내를 내다보면 음정과 박자를 웬만큼 맞춰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다른 예술 영역처럼 글쓰기 또한 모방/따라하기에서 시작한다. 자, 이제 수필이나 동화를 쓰고자 간절히 열망하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눈을 멀게 한 수필가나 동화작가가 있는가. 있다면 누구누구인가. 그간 진지하게 읽은 수필이나 동화는 몇 편인가. 바로 지금, 내용이나 줄거리를 훤히 꿰고 있는 작품은 과연 몇 편이나 되는가.장차 시인이 되고 싶은 당신에게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단어나 음절 하나까지 빠트리고 않고(시는 이런 것까지도 매우 중요하니까) 줄줄이 암송할 수 있는 시는 몇 편이나 되는가. 시를 한 이백 편쯤 암송하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을 혹시 한번쯤이라도 들어본 적 있는가.만약 당신이 시를 쓰고 싶다면 그동안 좋은 시를 많이 쓴 시인부터 찾아 나서자. 동화를 쓰고 싶은 당신도 우리나라(물론 외국의 작가도 좋지만)의 좋은 동화작가들은 누구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물론 수필을 쓰고자 하는 당신도 예외가 아니다. 당신의 눈을 멀게까지 할 만한 시인이나 수필가나 동화작가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마음에 쏙 들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런대로 괜찮다' 싶은 작가들이어도 무방하다. 그들이 펴낸 작품집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번거로움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자. 이 과정에서는 주변의 잘 아는 시인, 동화작가, 수필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잠시 숨을 고르고 옛날 선비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TV에서 봤던 장면이어도 좋으니 눈앞에 한번 그려보자. 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구장창 읽고 외우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도 그들처럼 수집한 작품을 반복해서 읽도록 하자. 대충 읽어서는 안 된다. 몇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거기 적힌 문장 하나하나를 손톱으로 파내듯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어떤 작품은 이해는커녕 내용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자. 자, 충분히 읽었으면 이제 밤을 새워가며 노트에 베껴 쓰기를 시작하자. 이따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베껴 쓰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베껴 쓰면서 그 작품을 쓴 작가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자. 단어나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가면서 그 대목을 그런 식으로 쓴 까닭은 무엇인지 수시로 묻고 답을 찾아보자.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쓰고 싶어하는 글의 기본적인 개념이 펜을 쥔 손끝을 타고 가슴과 머리를 거쳐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나가고, 또 어떤 식으로 결말지어야 더 큰 울림을 주는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눈이 열릴 것이다. 베껴 쓰기를 지속적으로 하면 맞춤법에 맞는 단어를 골라서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도 키울 수 있고, 문장을 어법에 맞게 쓸 수 있는 능력,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서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도 자연스럽게 갖출 수 있게 된다. 이건 물론, 밤새워 공을 들인 베껴 쓰기의 덤이다.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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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10 23:02

2. 안 쓰고 못 쓰면 나만 손해다

△행복한 마음의 감옥 누구나 좋아하는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양식이 같은 글이라도 어떤 사람은 쓰기 싫다고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게 유일한 낙이라고도 한다.어떤 방송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기 때문에, 애인을 만들 생각이나 겨를도 없이, '대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송 원고를 쓴다고 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란다. 들어주는 사람이 많으니 뿌듯한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란다. 글을 쓰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그게 뭣 때문에 그렇게 즐겁냐고 물으면 그냥 좋아서라고 대답한다. 그들이 글을 쓰는 목적은 두 가지다.하나는 내면의 정리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과의 '교감(交感)'을 통한 '동화(同化)'다. 방송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리해서 원고를 쓰고, 아나운서나 DJ의 입을 빌려서 청취자들과 서로 교감하고 그들을 자신에 동화시킨다.내면을 정리하는 글로 대표적인 것이 일기다. 다른 사람과의 직접적인 교감이나 동화가 목적인 글로는 편지가 있다. 이렇듯 타인과 교감하고 그들을 자신의 생각과 느낌으로 동화시키는 거야말로 글을 쓰는 가장 큰 즐거움일 것이다. 물론 글을 쓰는 일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훨씬 힘든 노동임에 틀림없다. 글을 쓰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이들도 마음먹은 대로 글이 진척되지 않은 때는 글쓰기를 형벌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른 이들과 활발히 소통할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닦으면 생기는 글 솜씨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국 북송시대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은 글 솜씨를 갖추고 싶은 이들에게는 여전히 금과옥조다. 그는 '다독', 다작', '다상량'을 강조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책을 얼마나 많이 읽고, 어떤 식으로 자주 쓸 것이며,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글 솜씨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다독'을 먼저 생각해 보자. 이건 말 그대로 책을 많이 읽으라는 뜻이다. 책에 든 것은 모두 글이다(아이들이 주로 보는 그림책이나, 사진작가가 펴낸 사진책 등은 물론 예외다. 그렇다고 이런 책들이 글쓰기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책 속의 글은 그걸 쓴 사람이 체험해서 얻은 지식이나 생각과 느낌의 결정체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건 그걸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간접체험을 축적했다는 건 운동으로 말하면 어떤 경기를 끝까지 소화해 낼 수 있는 기초체력을 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풍부한 간접체험은 글이 막힐 때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나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글을 얼마나 읽어야 하는가. 다다익선이다. 어떤 시인은 시 한 줄을 쓰기 위해 적어도 백 줄을 읽는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야말로 일당백(一當百) 아니면 일당천(一當千)이다. 수필이든 소설이든 백 편 이상 읽고 한 편을 쓰겠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말이다. 물론 수필을 쓰려면 수필만 읽고, 시만 읽어서 시를 쓰라는 얘기가 아니다. 수필을 읽어서 소설을 쓰고, 소설을 읽어서 시도 쓰고, 시를 읽어서 수필도 쓴다. 식물도감을 열심히 뒤적거려서 시를 쓰는 데 도움을 얻기도 한다. 역사나 철학 관련서적을 탐독해서 소설감을 구하기도 하라는 말이다. '다작'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이때도 중요한 게 있다. 무조건 많이 쓰기만 하면 글 솜씨도 향상될 거라는 믿음은 버리라는 말이다. 어떤 일이든 바라는 성과는 투자한 시간의 양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들여서도 얼마나 집중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법이다. 글을 쓸 때는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신이 구사한 문장이 어법에 맞는지도 꼼꼼하게 따져보는 습관도 중요하다. 그래야 장차 유려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고, 글 솜씨의 향상도 기대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글은 반드시 끝맺음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마무리를 짓지 않은 건 글이라고 보기 어렵다. 성에 차지 않는다고 중도에서 그만둔 수십 편의 미완성 글보다 내용이나 형식은 다소 어설퍼도 끝까지 쓴 한 편의 글이 자신의 글 솜씨를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훨씬 많이 된다는 걸 맘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생각을 많이 하라는 것이 '다상량'이다. '다독'이나 '다작'처럼 생각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글쓰기에 직접 도움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생각을 통해 글 솜씨를 향상시키려면 우선 관찰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관찰은 독서와 달리 자신의 눈으로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나 사건을 직접 바라보고 확인하는 직접체험의 과정이다. 관찰은 꼼꼼하게 해야 한다. 대상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수시로 집어넣으라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행한 관찰만이 글의 깊이를 더하고 넓이를 확장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독서와 더불어 세상에 대한 지속적이고 꼼꼼한 관찰은 다양하고 깊이 있는 생각의 원천이다. 생각도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에는 '반복'의 뜻이 들어 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생각도 많이 혹은 자주 해 본 사람이 잘 하는 법이다. 생각은 어떻게 연습해야 하는가. 모든 생각의 대상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 현상들이다. 그러니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생각의 출발점이다. 대개는 그것에 의문점을 던지는 것으로 생각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인터넷 신문기사를 읽고 댓글을 검색해서 자신의 생각과 비교해 보는 것도 생각을 연습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자신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여러 각도에서 따져보는 것도 좋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해결 방안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돌이켜보면서 상대방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자신으로 인해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인지 입장을 바꿔보는 방법도 있다. 어쨌든 생각을 곰곰이 자주 하다 보면 남다른 지혜와 판단력도 자연스럽게 생긴다. 이런 것들이 글쓰기에 직접 도움이 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누구나 쓰는 글 글재주가 영 신통치 않아서 글을 잘 못 쓴다고 회의하거나 한탄하지 말자. 그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다. 책을 읽는 건 골치 아프고, 어떤 일에 관심을 갖고 자세히 관찰하는 일도 번거롭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보다는 즉흥적으로 먹고 마시는 게 취향에 맞아서 그냥저냥 되는대로 살고 싶은 사람은 평생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글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글쓰기를 꺼린다. 왜 그럴까.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서다. 어떤 일이든 처음에는 다 어렵다. 그런데 웬만한 일은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붙고, 잘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잘 하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글 솜씨가 부족하다고 쓰기를 망설이면 앞으로도 못 쓰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안 쓰고 못 쓰면 나만 손해다. 지금부터라도 당장 많이 읽고 자주 써보기를 시작하자. 눈에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세히 관찰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생각을 끝없이 불어넣으며 다양하게 상상해 보는 습관을 갖도록 노력하자. 그러면 나도 쓸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즐겁고 행복한 글쓰기다. 그렇게 쓰는 글만이 나를 바꿔나가는 데 직접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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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5.03 23:02

1. 글쓰기는 당신을 다듬어 키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을 지속적으로 다듬어 키워간다. 피트니스 클럽에서 날씬한 몸매를 가꾸기도 하고, 음악이나 미술 작품을 깊이 음미할 수 있는 소양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자신을 다듬어 키우는 방식으로 글쓰기만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그런가.△글 쓰는 이들의 특성 시인, 소설가, 신문이나 잡지의 기자, 방송국 PD와 같이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들이나 평소 글을 열심히 쓰는 사람들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우선 그들은 독서량이 풍부할 것으로 짐작된다. 어떤 방면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이 쓴 글로 읽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겠는가.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특히 감수성이 풍부한 이들이 많다. 감수성은 '자극을 받아들여 느끼는 성질이나 성향'을 뜻한다. 이런 감수성이야말로 읽는 이들의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주거나 새로운 느낌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안겨주는 원동력이다. 좋은 글을 쓰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또 있다. 글을 쓰는 이들은 관찰력도 뛰어나다. 그들은 언제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서 어떤 얘기를 나누든 항상 쓸거리를 찾는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풀잎 하나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글감이 될 만한 것이면 뭐든 남김없이 포획할 수 있는 포충망을 가슴속에 항상 숨겨갖고 다니는 게 그들이다. 이건 참 독특하다 싶은 게 눈에 띌 때도 좀처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가리지 않는다. 수시로 메모하거나 머릿속에 새겨두기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렇듯 글을 쓰는 사람들의 눈과 귀는 언제든 열려 있다. 그러니 관찰력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또 박학다식하고 잡학다식하다. 어느 시인은 들과 산에서 피어나는 온갖 꽃과 나무 이름을 모르는 게 없을 정도다. 심지어는 작은 들풀 하나조차 그 특유의 생태는 물론이고 재미나는 별칭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이런 지식은 어느 것 하나 거저 얻어지는 것이 없다. 잘 모르는 대상에 호기심을 갖고 식물도감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인터넷도 수시로 검색해서 얻은 결과다.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에 자신만의 생각과 느낌을 버무려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쓰는 것이다.글을 쓰는 이들은 보편화된 사실은 물론이고 그 이면에 가려진 진실을 끄집어내서 확고히 정립된 자신의 주관에 따라 세상이 변해가는 흐름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개인적인 일이든 사회적 사건이든 어떤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른다 싶으면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간파할 줄 안다.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데도 비교적 능숙하다. 그런 일이 갖는 사회역사적 가치나 상호관계의 의미망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내가 쓰는 글 한 편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성적이 껑충 뛰어서 장학금도 받고 싶고, 승진도 하고 싶고,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하기를 꿈꾼다. 매끈하게 빠진 자동차도 굴리고 싶다. 사이판이나 괌 같은 휴양지에서 석양을 배경으로 야자나무 그늘 아래 누워서 휴가도 맘껏 즐기고 싶지 않은가. 오백 명쯤 되는 청중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강연을 멋들어지게 하는 건 또 어떤가. 이태석 신부처럼 헌신적인 봉사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고 싶기도 할 것이다. 수백 년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시나 소설을 쓸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루려면 뭐든 시작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는 어떻게 다르고 같은가. 내 안에 들어 있으되 정작 나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남다른 능력 같은 건 혹시 없는가. 그걸 알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지난날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현재 자신의 모습은 어떤가. 그런 다음 글로 쓰는 것이다. 그러면 나를 발견하고 정리할 수 있다. 나아가 지금보다 더 큰 나로 가꾸어갈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있다. 물론 나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글 쓰는 사람을 닮아가는 것이다. 글을 지속적으로 쓴다면 나 또한 그들처럼 책도 많이 읽어서 아는 것도 많아지고, 감수성도 풍부해지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습관도 생기며, 박학다식해질 뿐만 아니라, 넓고 깊고 체계적으로 생각할 줄 알게 될 거라는 믿음을 이제부터 마음속에 꾹꾹 다져보라는 말이다. 앞서 보았지 않은가. 글을 쓰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런 다양한 소양들이 별로 가치가 없다거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 어느 하나라도 있는가. 아니, 오히려 그런 점들을 갖춰가는 것이 바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길 아닌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매화꽃이 피면그대 오신다고 하기에매화더러 피지 말라고 했어요그냥, 지금처럼피우려고만 하라구요(김용택,'매화'전문)짤막한 시 한 편이 우리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는 게 '매화'다. 어딘가에서 매화를 발견한 시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매화에게 눈길을 주다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런 말 걸기를 통해 시인은 사랑하는 '그대'를 당장 만나는 반가움보다 기다리는 설렘을 오래오래 지속시키고 싶어하는 우리들 모두의 보편적 심정을 한 편의 깔끔한 시로 그려낸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아니, 입장을 바꿔놓고 상상해 보자. 이 시를 만약 당신이 썼다면, 당신도 가끔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 봄나들이를 다녀온 뒤 이런 시를 몇 편 써서 가까운 누군가와 함께 나눠 읽을 수 있다면, 아,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그런 즐거움을 누리면서 당신은 스스로를 썩 괜찮은 사람으로 얼마든지 가꾸고 바꿔나갈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글쓰기를 생활화하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머지않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행을 가서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눈빛을 반짝이게 될 것이고, 인상적인 장면이 눈에 띄면 사진도 찍도 메모도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주변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지면 그걸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유심히 바라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 자기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기 위해 골똘히 생각하기도 멈추지 않게 될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나 독특한 생각과 느낌이 담긴 책도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읽게 될 것이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는 습관이 몸에 밸 것이다. 나무 한 그루나 풀 한 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걸 글로 다듬어 지속적으로 쓰다 보면 머지않은 장래의 어느날 한층 성숙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쓰기야말로 나 자신을 다듬어 키우고, 나아가 자신을 크게 변화시키는 데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송준호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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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4.26 23:02

"글은 누구나 조금만 관심 가지면 쓸 수 있죠"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글인데도 글쓰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글쓰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우석대 송준호 교수(문예창작과)는 전문 작가나 특별한 사람들만 글을 쓰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런 인식을 떨치고 누구나 평상시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단다. 그는 독서모임이이나 글쓰기 모임, 도서관 개관 행사에 초청 강사로 나설 때마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강조한다. '글쓰기 전도사'를 자임해온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글쓰기야말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조차 모르던 '나'를 발견해서 키우고 바꿔가는 가장 좋은 방법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글은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생각과 마음으로 쓰는 것이기에 평소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유심히 들여다보고 더 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가 매주 1차례 본보 독자들과 만난다.'왜 써야 하는지,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쓸 것인지'를 구체적인 사례와 설명을 곁들인 연재물이다. 송 교수는 글쓰기 관련 책 발간을 준비하면서 독자들과 미리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독자들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싶다는 소감도 곁들였다.송 교수(52)는 전북대 국문과 출신으로, 1991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본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수필부문)으로도 활동했으며, 소설집 '비너스의 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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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3.04.26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