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훌륭한 선생님들 '행운'
나는 배우 인생을 시작한 후 중요한 시기에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연극이론을 가르쳐주신 나소운 선생님, 연극의 실제를 가르쳐주신 이진순 선생님, 연극에 대한 사명감을 일깨워주신 이해랑 선생님, 대학진학을 도와주신 양광남 선생님,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이근삼 선생님 등의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나는 1958년 들어간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나소운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시나리오도 직접 쓰고, 연기, 감독도 하신 신극배우로 지금은 돌아가셨다. 그동안 나는 연극에 깊이 매료되기는 했지만, 배우로서 갖춰야 할 이론적 토대는 부족했다. 그런 나에게 나소운 선생은 연기이론이라는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소운 선생은 작가이자 연기이론의 산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소련 '스타니 슬라브스키'의 연기이론을, 외국서적을 번역해 가며 꼼꼼이 가르쳐 주었다. 나는 조그만 노트에 선생의 강의를 빼꼼히 받아 적으며 연기이론에 눈을 떠갔다.
대학에 진학한 후 연극활동 하느라 학교 출석률이 나빴고, 시험 준비를 할 틈도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선생님한테 배운 이론을 토대로 학과 시험을 보면 비교적 좋은 학점을 얻었다. 나소운 선생님은 대학교에서 배울 것을 미리 가르쳐 주신 셈인데, 그 분 때문에 나는 연극 이론을 배우고, 또 연극의 참맛을 알게 됐다.
나는 또 배우학원에서 내 연기 인생에 큰 도움을 주신 또 한 분을 만났는데 바로 양광남 선생님이다. 미국 유타주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연극학 석사를 받은 분인데, 당시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그 분이 "미스터 박, 연극을 더 깊게 하려면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해"하고 자주 권했는데, 나는 양광남 선생님에게 자극을 받아 약 3개월 동안 대입 시험공부에 몰두했고,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한국배우전문학원 시절, 나는 학원생 중에서 남자 여섯 명, 여자 네 명 등과 모여 극단 '협연'을 만들었다. 우리는 작품을 공연하기 위한 열정으로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59년 처음으로 원각사에서 제1회 공연을 올리는 집념을 보였다. 학교가 아닌 사회에 나와 무대에 올린 첫 연극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극단 협연은 2년 후 해체되고 말았는데, 당시 협연에서 무대에 올린 작품은 임희재 선생의 창작희곡인 '꽃잎을 먹고사는 기관차'와 외국작품인 '미스터 로버츠' 등이다.
또 기존의 '동인극단', '광장' 등 동인제 연극단체에 들어가서 연기활동을 계속했다. 그처럼 연기에 몰입해 있었던 나는 대학 입학 후 연기가 아닌 연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나 신은 나를 끝내 배우의 길로 인도했다. 중앙대에 입학한 59년. 학교에서는 임영신 총장 60회 생신 기념으로 효자동 소재 숙명여고 강당인 삼일당에서 연극을 올리기로 했다. 여기서 나는 조연출을 맡았다. 그런데 당초 주인공인 샤일록 역을 맡기로 한 최정훈씨가 '펑크'내는 바람에 조연출을 맡고 있던 나에게 주연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 해 말에 극작가이자 연극평론가인 동국대 이근삼 교수가 그 해 대학극의 두 사람으로 고려대의 여운계씨와 나를 뽑아 '올해의 배우'라고 호평한 글이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이를 계기로 나는 배우로서의 확실한 입지를 굳혀갈 수 있었다. 당시 연극인들은 이근삼 교수의 날카로운 비평에 난자당하기 일쑤였기에 이 교수의 호평은 의미가 더욱 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연기활동에 더욱 몰입했는데, 그 이듬해에는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등 4개 대학 연극인들이 모인 '학생계몽연극단'에서 중앙대생인 나를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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