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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사리장엄, 1400년의 꿈] 2."익산이 백제 왕도였다는 사실 증명"

사리장엄 공양품중 은화관식·금제소형판, 중앙관리 지방파견 상징 표지적 유물

백제시대의 사비 천도 후 창건된 거의 모든 사찰은 일탑식가람배치 곧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남향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는 중앙에 중원을 두고 동과 서쪽에 각각 동원과 서원을 배치한 고대 불교국가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매우 독특한 3원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중원의 목탑과 금당은 동·서원의 석탑이나 금당보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동일한 레벨에 위치한 동·서원보다 높은 기단 위에 조영되었고, 동서의 석탑과 달리 아주 정교하게 판축된 기단 위에 목탑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강당이나 외부로 통하게 되어있는 동·서원의 회랑에 비해 중원의 회랑은 4면이 폐쇄된 형태로 돌려져 있고, 그 공간너비도 더 넓기 때문에 동원이나 서원에 비해 더욱 신성하고 존엄한 공간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원에는 백제의 전통적인 목탑을 배치하고 동·서원에서는 당시로서는 유래가 없는 석탑을 창안 배치하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에서 각원 조성의 선후관계가 파악된다. 따라서 미륵사 가람에서는 중원이 중심이며 동원과 서원은 종적인 가람으로 기획되었고, 창건과정에서 가장 먼저 건축이 이루어지는 곳은 이 사찰의 중심인 중원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강당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서는 을축(605년) 갑신(624년) 정해(627년) 기축(629년)년명 등 간지(干支)가 새겨져 있어서 미륵사 창건이나 중수연대를 살필 수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결국 미륵사 창건은 무왕 재위 이른 시기의 어느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서탑의 사리봉안기에 나타난 '기해'(639년)가 곧 미륵사의 창건연대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미륵사 창건과 관련은 중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금번 발견된 사리장치의 내용은 서원 석탑에 관련된 것으로 국한해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왕은 왜 당시 왕도였던 부여가 아닌 익산에 대규모의 사찰을 조성한 것일까? 백제는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사씨와 연씨 등이 주축이 된 대성팔족의 막강한 권력은 왕권과 대립하여 정치적인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는데, 무왕 이전의 혜왕과 법왕의 재위년간이 불과 1~2년 밖에 되지 않는 데서 당시의 정정불안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한 정치적인 혼란상태 속에서 즉위한 무왕은 우선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왕권 강화가 필수적이었을 것이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인 후원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무왕은 사비에서 멀지않은 지역인 익산을 중심으로 마한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정치세력의 도움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현안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익산지역에는 미륵사와 더불어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인 왕궁유적과 미륵산성을 비롯한 많은 수의 성곽유적,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전해오는 쌍릉 등 고대 수도를 경영하는데 있어 4대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무왕대 천도지로 주목되고 있다. 백제 말기 익산천도와 관련해서는 일본 교토 청련원에 소장된 「관세음응험기」에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라 되어 있는데 지모밀은 왕궁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익산천도의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제석사의 화재사실과 목탑에 안치되었던 사리장엄구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1965년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일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제석사지 인근에서 화재 후 이 사찰의 폐기물을 한 곳에 모아 버린 장소가 발견되어 「관세음응험기」의 신뢰성을 더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무왕은 익산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전통의 정치세력의 후원을 등에 업고 왕권강화를 이루어 전대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백제 중흥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익산천도로 귀결지을 수 있는데, 당시 정치적 통합 못지않게 갈등과 반목으로 갈라져 있던 전 백제인의 정신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도량이 필요했을 것인데 미륵사 창건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금번 미륵사 석탑 사리장엄구의 공양품 가운데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외에도 은화관식과 금제소형판이 주목된다. 은화관식은 6품이상의 관리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지금까지 사비시대의 횡혈식석실분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중앙관리의 지방파견을 상징하는 표지적 유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금제소형판에는 '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중부의 덕솔이 금덩이 1매를 바친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미륵사 건립에는 왕실에서부터 관리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그야말로 국가적 사업으로 이룩된 사찰이었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왕도가 아닌 곳에 이러한 국가적인 대규모 가람 건축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바로 이번에 발견된 서탑의 사리장엄이야말로 익산이 백제 왕도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최완규(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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