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정상회담을 보고서 나의 조그마한 독일에서의 경험이 혹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펜을 들게 되었다. 당일 TV를 시청하는 동안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처럼 고대했던 통일이 머지않아 이루어지겠구나 하는 설레임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그토록 쉽게 풀려갈 수 있는 일들이 왜 그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는지 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설레임과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마음을 잘 가다듬을 수 있도록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지난날 나는 주로 연구 목적으로 서너 차례에 걸쳐서 상당기간 서베를린에서 체재한 적이 있었다. 뮌헨에 있는 독일현대사연구소에서 1년 동안 ‘독일의 분단’에 대해 연구했고 또 독일이 통일된 후에는 교육부 지원으로 서베를린에서 ‘독일의 통일’을 연구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독일재단의 지원으로 '한국 전쟁이 독일의 재무장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연구하는 중에 분단 독일의 여러가지에 대해서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연구에 열중하면서 지냈지만 세상, 특히 분단 하의 독일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알기 위해서 자주 라디오를 켜게 되었다. 라디오를 켜면 역시 동독지역이라서인지 서베를린 방송보다는 동독 방송이 주를 이루는데 하나같이 서독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방이었다. 비방이 언짢은 정도를 지나쳐서 식상함과 혐오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다른 내용을 듣고자 채널을 돌려도 들리는 내용은 비슷하였다. 이 비방의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내가 비무장지대에서 밤낮 없이 들어왔던 북한의 비난방송보다 훨씬 더 했다. 그런데 서독의 방송을 듣고 신문을 보면 우리는 당신들의 험담과 비방에 개의치 않고 어렵게 살아가는 당신들을 도울 것이며 통일을 앞당기고자 한다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특히 사민당의 브란트 수상 집권 이래 서독정부는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동독에 과감한 접근정책으로 동독에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을 했을 뿐 아니라 서독인들의 동독방문시 일정한 액수 이상 동독 화폐로 환전해야 하는 일에 동의했고 동독인들의 서독 친척방문시에 여러 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왜 서독이 그렇게 많은 비방과 음해를 받으면서 인내와 함께 사랑을 베푸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독일은 통일되었다. 그것도 동독인들이 서독의 헌법을 받아들이겠다는 식의 흡수통일이 이루어졌다. 비록 험란한 날씨 속에서 뿌린 사랑의 씨앗이었지만 커다란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랑은 불교의 해탈이나 유교의 효제보다 더 위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김대통령의 평양방문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닌 용단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먼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과 동포애에서 비롯된 것이고 괴테가 말한대로 새로운 운명을 지어가는 신의 뜻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가 금번의 운명적 호기를 최대한 선용해서 남북의 동포들이 더욱 가까워지고 상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와 국민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나타난 두 가지 중차대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 하나는 동독의 운명이 기로에 서 있을 때 동독의 집권자들은 프라하·천안문 사태에서와 같이 무력진압으로 끝내 체제유지를 하려 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통일의 원동력으로서 동독인들이 여행, 인적교류, TV를 통해서 수준 높은 서독인들의 삶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또 서독인들의 삶을 몹시 부러워해서 서독에의 흡수통일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북한을 돕고 협력하되 우리의 삶의 질을 꾸준히 높여야 만이 가까운 장래에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 통일이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규하(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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