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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가을 편지 - 이세재

이세재(우석고 교사)

죽고 싶을 땐 살아가야 할 존재 이유를, 살고 싶을 땐 영혼의 한 부분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일찍이 깨닫고 떠나버린 그대여!

 

순리에 익숙한 계절들은 왔다간 가고 또 가지만 풀어도 풀어도 의문만 쌓이는 나의 세월은 갈수록 낯설기만 합니다. 지금, 또 가을은 깊어가고 있으나 릴케의 마지막 과실에 이틀의 햇살이 부족했던 것처럼 내 삶과 죽음의 문을 통하게 해줄 한 방울의 피가 부족합니다.

 

서늘한 듯 차가운 듯, 정겨운 듯 쓸쓸한 듯한 가을밤 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듭니다. 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그 창문을 통째로 열어젖힙니다. 아직도 이렇게 그대를 향한 피는 식지 않았는데 창밖의 플라타너스 잎처럼 내 자신의 존재 이유는 메말라 갑니다. 봄날에 아름답던 내 꽃잎은 허무하게 졌고, 그 자리에 다시 사과가 열렸고, 그 사과가 익기도 전에 햇살이 식어가는 가을의 이유를 나는 그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100년쯤이나 후에 지금 그대가 있는 곳에 가면 이 가슴이 트일지, 그래서 그리운 그대여.

 

살고 죽는 이유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의 유전자는 진화를 거듭했음에도 나의 세계는 아직 현실에의 저항과 순응의 고리를 풀지 못하는 어둠뿐입니다. 진?선?미에 싫증난 사람들과 더불어 허위와 악함과 혐오감을 오히려 즐기는 천박한 문화에 묻혀가면서도 거기에 저항할 피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대자연의 도전에 저항하여 문명을 이룩했고, 귀족과 천민의 신분적 차별에 저항하여 평등과 자유를 얻었고, 그 문명과 평등과 자유의 질적 공유를 위해 크고 작게 투쟁해온 조상의 핏속에서 뜨겁게 흐르던 저항의 유전자는 이제 풍요로운 자유와 물질에 묻혀 잠들었습니다. 아니, 물질을 위한, 물질에 의한 투쟁의 유전자로 변질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 주체할 수 없는 자유에의 불안과 고독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쥐꼬리만한 권력으로라도, 아니면 더 큰 권위에 개처럼 복종을 해서라도, 그것도 아니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춤을 추는 자동인형이 되어서라도 나는 불안한 ‘나’를 버리고 어딘가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초라하게 나의 가을은 깊어 갑니다. 순리를 아는 낙엽은 익숙하게 제 자리를 찾아 비행을 하는데 내 삶과 죽음을 잇는 존재의 다리로 놓여 있어야 할 나는 타자(他者)의 부속품으로 소모되어 갑니다. 다시 봄이 올 때 나는 나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러나 그대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100년쯤 앞에 서 있음을 느끼는 이 감각은 100년 안에 언젠가는 나도 스스로의 혁명에 의해 지금 그대가 있는 곳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대를 향하여 가을밤 쓸쓸한 창문을 열어젖히는 이 그리움의 피는 지금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홀로 사랑을 완성하라며 떠나간 그대여!

 

/이세재(우석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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