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지음·이수련 옮김·인간사랑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라고 한 것은 김수영이었다. 이 시를 읽은 이후로 나는 우울하고 짜증날 때마다 방의 구조를 바꾼다. 아마도 세상이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아니, 내가 너무 세상과 지독하게 타협하며 살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리라.
모든 것이 새롭게 움트는 이 눈부신 새봄에 나는 어김없이 또 연구실을 들쑤시고야 말았다. 그러다가 포스트잍이 잔뜩 붙어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새삼 그 책에 다시 빠져 들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지금은 흔히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초기 저작이며, 슬라보예 지젝을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오르게 한 바로 그 책이기도 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우선 그토록 비이성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역사상 수시로 출몰하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답한다. 지젝에 따르면 나찌즘, 스탈린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들의 폭력성은 우선 사회적 증상을 고안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사실, 혹은 사물의 자연적 속성이라고 규정하는 물신주의적 오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것을 전적으로 자기화하는 인간 주체들의 활동이 덧붙여지면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이 완성된다. 즉 인간 주체들은 실재계에 대한 왜곡과 배제를 통해 구성된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자기화하고 또 상상계적 동일시를 통하여 자기를 구성하며 이것이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을 광기의 그것으로 전화시킨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지젝은 각각의 주체들이 이데올로기에 빠져드는 것은 그들이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에 기만당해서가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의 비합리성을 알고 있지만 행한다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이데올로기들이 비합리적이고 허구적일수록 그것에 빠져드는 바, 각각의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숭고한 이념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형성 과정을 통해 지젝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주 역설적이다.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이 무슨 문제를 발본적으로 '극복하거나' '소멸시키'려는 욕망에서 발원한 만큼, 그리고 인류가 경험한 가장 끔찍한 대량학살과 홀로코스트는 언제나 적대적인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신생 인류로의 도약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만큼, 이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슨 문제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 문제들과 대면하려는 자세, 지젝 자신의 다른 글 제목에 따르자면 '파국과 함께 하기' 바로 그것이라는 것.
이처럼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과는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그 관점에 따라 인류 역사 전체를 다시 구성해낸다. 해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읽으면 아주 자연스레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다시 보게 되고 우리는 '세계내적 위치'도 다시 조정하게 된다. 한마디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은 세계를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세계를 바꾸어 읽을 수 있는 중요한 토양을 제공하는 바로 그 책, 그러니까 위대한 저서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한 마디만 덧붙이자. 그런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은 읽어내기가 마치 세상 바꾸기만큼 어렵다는 것. 하지만 거듭거듭 음미하며 읽으면 세상이 좋게 변하지 않아도 굳이 '방을 바꿀'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류보선(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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