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희(전주문화방송 아나운서)
새학년을 맞아 아이들 학교에서 학부모회를 한다는 통지문이 왔다. 개교 한지 수십년이 되는 학교는 새 건물을 짓느라 분주하다.
낡은 건물들 속에 새로 지은 건물이 키발을 딛듯, 비죽 솟아나고 있다. 마치 40여년된 오래된 몸을 가진 우리 학부모들과 새로 솟아나는 아이들이 대비되는 것같다. 그 속에서 무리지어 서있는 학생들은 사뭇 역동적이다. 늦은 시간 학원에서 홀로 돌아올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짙은 청색 웃옷에 청색 바지, 그리고 체크무늬 주름치마. 어떤 아이들은 학부모들을 안내한다며 수줍게 서 있었고, 웃고 소리치고 뛰듯이 걸어가는 모습에는 누르고 또 눌러도 다시 튀어오르는 생명력이 넘친다. 아이들은 새로 지은 4층 건물보다도 더 화사했다.
강당 안쪽으로 들어서니 학급담임을 맡은 선생님들이 죽 서계신다. 그 중에는 아이의 이전 학년 담임선생님도 계신다. 지난 학년을 마치고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오래전에 학교를 마친 옛 제자가 이번에 대학교에 들어갔는데 병으로 누워만계시는 아버지랑 둘이서 살고 있는 소녀가장이라는 것이었다. 중학시절부터 어려운 형편에 공부하느라 애를 썼는데 이번에 대학에 들어갔고 입학등록금을 적금을 부어 마련해 낸 기특한 제자라며 혹시, 방송을 통해 그 가정을 도울 수는 없겠냐고 하셨다. 입학등록금은 몇 년 동안 부운 적금으로 마련했지만 앞으로 4년 동안 책값이며 학비가 걱정스럽다는 말씀이셨다. 워낙 성실하고 열의가 있는 제자이니 조금만 도우면 줄업 후 자기 인생을 잘 꾸려갈 것이라며 방송을 부탁하셨다. 선생님의 제안에 몇 사람이 나섰고, 몇 가족이 그 가정을 돕기 위해 나서고 있다.
간혹 신문 방송을 통해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 있는 학생들이 보도되곤 한다. 그런데 그 학생들을 돕는 이들은 자신 역시 어려움 속에 있어보았던 사람들이거나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시련을 이겨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서로 돕는 공동체적 자산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포기하고 좌절하고 싶은 순간에도 나를 지켜보는 단 한 사람의 눈길이 느껴지면 인간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여러해 전 졸업한 가난한 형편의 제자를 오래도록 지켜보아온 선생님으로 인해 한 가정이 유지되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누워만 있는 병 든 아버지를 모시고 어린 소녀는 막막할 때도 많았을 것이다. 달려가 이야기할 수 있는 선생님이 계셔서 한결 든든했으리라.
많은 가정들이 질병이나 가난, 그밖의 여러 이유로 해채되고 있고가정의 형태 역시 무척 다양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보고 책임질 능력이 없는 어린이들, 늙고 병든 사람들, 이주여성과 온누리안 아이들, 이런 가정을 여러 측면에서 보조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확보가 절실하다. 아직 국가 쳬계는 정비되지 않았고 우리 가정은 언제든 해체될 위기가 올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오래전에 “이웃사촌”이라는 용어를 생산했던 우리는 이미 심정적으로 지역사회 네트워크에 대한 훈련이 되어왔었다. 아직 크게 부족한 사회 안전망을 대신할 “이웃사촌 네크워크”는 하나의 대안으로 작동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웃사촌네트워크의 제안과 구성이다. 사회복지 공동모금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를 이용하는 것도 좋으나 기초생활수급자 등에게 한정되는 경우가 많아 차상위계층에는 지원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와 도움을 줄 이웃을 연결하고 격려하는 일, 우선 학교를 중심으로 그 일이 시작되었으면 한다. 정서적,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성장기의 아이들과 그 도움을 줄 지역사회 구성원을 연결하는 일, 아이들의 삶에 일정 부분 개입하는 선생님들로서는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학교가 사교육 시장에 아이들을 뺏기고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며 매를 맞고 있으나 학교는 여전히 존재할 이유와 가치를 지닌다. 바쁜 부모, 가난한 부모, 병 든 부모를 대신하는 네트워크의 구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 한 아이의 성장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사랑과 염려로 바라보는 스승이 있다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윤승희(전주문화방송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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