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웨일즈 지음·송영인 옮김·동녘
내가 일본 유학중이었던 1985년 어느 날 일본현대사 특히 일본군사사의 대가이셨던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선생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후지와라 선생은 특별한 경력을 가진 분이셨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 유명한 명문가의 집에서 태어난 선생은 당시 시대 상황에 따라 '군국주의 소년'으로 자랐고, 집안의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서 중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중국전선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통해 일본 천황제 국가의 모순을 몸으로 직접 감지했고, 침략전쟁의 부당성과 부하들의 '개죽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지휘했던 부대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부당한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명령불복종은 당시 일본 군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즉결처분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른들이 일본 군부의 수뇌부에 있는 등 워낙 막강한 집안의 자식이라 처분은 받지 않고 대신 휴가 없이 4년간 최전선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하여 일본의 침략사를 공부하기 위해 동경대학 역사학과에 재입학하였고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연구와 사회활동에 정렬을 쏟았던 분이셨다.
선생의 집에 들어서자 집안 전체가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거실에는 우리들 학생들을 위해 조촐한 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몇 잔의 술이 오간 후 나는 선생께 질문을 했다. "이 많은 책과 자료들 중에서 선생님께 가장 인상에 남는 책은 어떤 것입니까?” 선생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라고.
나는 너무나 놀랐다. '아리랑'은 한국에서 1984년 동녘출판사에서 처음으로 번역 출간되어 음성적으로 읽히고 있었다. 나도 얼마 전 '아리랑'을 읽어 그 내용에 충격을 받고 나의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한국 유학생이니까 나를 배려해서 하는 대답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내 질문을 계기로 선생은 '술자리 강의'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전부 일본 학생들이었고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선생은 자신의 젊은 날의 경험을 섞어 '아리랑'의 내용을 풀어나갔다. 일본 학생들은 그런 책이 있나 하며 놀라면서 경청했다.
'아리랑'은 '중국의 붉은별'을 집필했던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부인 님 웨일즈(Nym Wales)가 불꽃처럼 살다간 조선인 혁명가 김산(본명 : 장지락)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님 웨일즈는 신문기자로서 당시 중국의 연안(延安)에서 자료를 수집하다가 김산을 만나게 된다. 김산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3월 10일 평양 교외의 차산리라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자라면서 동포들이 일본 순사들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혁명가의 꿈을 키웠다. 형의 구둣가게에서 일하며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얼마 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공산당에 가담하여 일본과 맞서 싸웠다. 그러다 일본군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를 의심했고 결국은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쓴 채 그가 키운 중국공산당의 보안기관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모진 한파와 굶주림, 고문 그리고 병마는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그런 고통 속에서도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을 바라보며 사라져간 김산의 모습은 고통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의 상징이며 빛이리라.
/이규태(한일장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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