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려있는 정보를 쓸모있는 지식으로
너무도 어려운 문제가 차고 넘치는 이 시대, 200년 전의 다산(茶山) 정약용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했을까? 사회 경제 정치적인 난제에 대해 가치판단과 주의주장이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경우가 많은 오늘날 신중하게 떠올려 볼 법한 의문이다. 그러나 다산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기가 녹녹한 일이 아니다, 자칫 자기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견강부회와 아전인수로 흐를 위험이 있다.
정민 교수의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을 정독하고 나면 난마와 같이 얽혀 정답을 찾기 불가능할 것 같은 문제들에 대한 답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르는 '통찰'의 체험을 할 수 있다. 다산은 한없이 잘게 쪼개고 해체하는 접근만 가능한듯한 이 시대에, 종합적 통분야적 문제 해결방식의 전범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문예부흥기의 다빈치처럼 못하는 것이 없이 사통팔달했던 이들을 '르네상스 맨'이라고 불렀다면 조선의 문예부흥기 영정조 시대의 인물 다산이야말로 전무후무한 르네상스 맨이었다.
걸출한 경학자(經學者), 예학자(禮學者)요, 교육학자이자 사학자였던, 진정으로 통합적인 인문학자였다. 그런가하면 수원 화성의 축성을 총지휘하고 필요한 기계설비들을 설계한 토목공학자이자 기계공학자였고, 지리학자였으며 의학자인, 실용적 과학자이기도 하였다. 또한 법학자이자 국어학자였고, 시인이자 문예비평가였다. 전설적인 참 목민관, 즉 행정가이자 탁월한 교육자였음은 물론이다.(정민)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탁월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이 경이(驚異)이자 불가사의에 대한 답을 저자 정민은, 다산이 널려있는 정보를 수집 정리해서 체계적이고 유용한 지식으로 탈바꿈시킬 줄 알았던 탁월한 지식편집가요 전방위적 지식경영가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23대 국왕 정조는 참으로 빼어난 군주였다. 근본적인 개혁으로 누습을 혁파하고 피폐한 사회를 되살려 국가의 부흥을 꾀하는데 정조와 다산은 진정 환상의 콤비였다. 그들의 경륜이 수십년 더 펼쳐졌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가 일찍 승하하고(독살설도 있는데) 다산은 정적들에 의해 축출되어 20년 가까운 유배생활을 보낸다. 그는 이 처절한 좌절과 절망의 시기에 역으로 조선 사상사와 학술사상 찬란한 업적을 이룩하여 과연 인간이 뜻을 세우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부와 저술, 편찬에 몰두하느라 방바닥에서 떼지 않은 복사뼈에는 세 번 구멍이 났고 이와 머리카락도 다 빠졌다. 집안은 몰락하고 후손들의 벼슬길은 다 막혔고 역경은 험준한 산과 같았지만 늘 한없는 따뜻함과 깊은 감성으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학정과 가렴주구,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는 민초들의 삶에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초당에 정원을 꾸미고 풍류를 잃지 않았다.
다산의 인간과 학문의 위대성을 갈파한 많은 저술이 있었지만 정민은 이 책에서 다산식 학문하기와 실천하기의 '과정'에 대하여 바로 그 다산식의 검토 분석을 놀랍게 해내었다. 정민은 이 책의 집필과정에서 "어느 순간부터 그가 내속으로 걸어 들어와 내 사고를 지배하고 자기 생각을 나를 시켜 말하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술회하였다. 이 말이 허사가 아님을 실감한다.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산이 이 암울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애타는 그러나 확신에 찬 시선을 우리에게 던지는 느낌이다. 이 책을 통해서 많은 이가 다산과 설레임으로 만나서 그의 애민심(愛民心)과, 지혜와 통찰, 견인불발의 실천력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면 저승에서 다산의 기쁨이 클 것이다.
/최효준(전북도립미술관장)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