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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옥중 서간 모음

'빠꾸와 오라이...소박한 입담·정겨운 그림...황대권 글과 그림·도솔오두막

황대권의 우리말속 일본말 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빠꾸와 오라이'는 각종 삽화가 읽는 이와 이해를 돕고 있다. (desk@jjan.kr)

‘곤색 교복 우와기를 걸치고 거울을 보니 에리가 삐뚤어져 있기에 바로 잡고 호꾸를 채웠다. 막내 고모는 세라복을 입고 거울을 수십 번도 더 들여다 본다. 작은 아버지는 오늘 관공서라도 가시는지 와이사쓰에 조끼에 즈봉에 가다마이로 쭉 뽑으셨다. 옆에서 보니 삐까삐까한 게 고급 기지인 듯 싶었다. 거기에다 오바까지 걸치니 완전히 영국신사가 되었다. 부엌을 보니 어머니는 몸뻬를 입은 채 가마솥에서 누룽지를 긁고 계셨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씨의 초등학교 3학년때 일기다.

 

과연 이 글에서 우리말과 일본말을 완벽하게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감옥에서 직접 쓰고 종이박스와 밥풀을 이용해 제본까지 한 책. ‘황대권의 우리말 속 일본말 여행’ 「빠꾸와 오라이」(도솔오두막)다. 우리말로 알았던 일본말 240여개를 추려내 어린시절 추억과 함께 들려주는 옥중서간 모음이다.

 

그의 유년시절은 6·70년대. 비슷한 시절을 보낸 이들이나 80년대 이후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모두 아련한 책이다. 소박한 입담에 곁들여진,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은 더욱 정겹다.

 

당시 구멍가게에서 사먹었던 과자류 중 가장 인기있었던 것은 ‘크라운 산도’와 ‘미루꾸 카라멜’.

 

“당시에는 ‘산도’가 뭔지 ‘미루꾸’가 뭔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고렇게 생긴 과자의 이름이려니 하고 먹기만 했지.”

 

‘산도’가 과자 두 개 사이에 크림을 넣은 샌드위치의 일본식 줄임말이고, ‘미루꾸 카라멜’은 ‘밀크 캐러멜’의 일본 발음이었던 것을 알고난 뒤 그는 씁쓸함을 맛봤다고 했다.

 

“이 말의 어원을 찾느라고 무던히도 헤맸다”는 ‘갑빠’. 그는 “‘갑빠’는 우리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지만, 이 나라 남자들은 거의 모두 알고있는 말”이라며 “일본어사전을 찾아보면 ‘갑빠’라는 항에 ‘포르투갈어 capa(카파) 소매 없는 비옷’이란 설명이 쓰여있다”고 설명했다.

 

나와바리, 돈까스, 모찌, 레자, 짬뽕, 찌라시, 카스테라, 쿠사리 등 일상에서 흔히 쓰는 일본말들을 발견하는 재미는 크다.

 

1700여 쪽이 넘는 사전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일본말로 얼룩져 있는 언어 세계와 언어를 통해 본 우리의 굴곡진 역사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황씨. 그는 “이 작업을 하면서 어려서부터 그때까지 당연히 우리말이라고 알고 있던 말들이 일본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경악했다”며 “성인이 될 때까지 걸핏하면 일본 놈들 나쁘다고 가르쳐온 어른들이 정작 우리의 사고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언어 세계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미워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잘 알기 위해서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감정적으로 남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은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인들이 볼 때 열등감의 표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며 “세계가 한 울타리 안에서 교류하는 시대에 과거의 상처를 이유로 감정적인 배척을 일삼아서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낼 수도, 우리 특유의 어문 체계를 가질 수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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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휘정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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