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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양반도 씨름을 했을까?

1803년 김상묵이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 28가지의 씨름 기술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desk@jjan.kr)

일본의 스모에 비한다면, 한국의 씨름은 그 인기도가 한참 떨어져 있다. 씨름이라고 해야 이제는 명절 때나 TV에 나오면 가끔 보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렸으니 한 때 화려했던 명성이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지는 않는 듯하다. 씨름하면 육중한 몸매에서 뿜어 나오는 화려한 기술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씨름은 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친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 잡고 힘과 재주를 부려 상대방을 먼저 넘어뜨리는 우리나라 고유의 운동으로 각저(角抵, 角?) ·각력(角力) ·각희(角戱) ·상박(相撲) 등으로 불리었다. 농경사회의 제례행사나 축제 때에 서로 겨루는 운동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이전에는 ‘무술’의 성격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씨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온다. 그에 의하면 신성한 제사 예식으로 여러 가지 기예를 시범하는 종목으로 “씰흠”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의 후한서에는 한나라의 왕이 부여왕을 맞이하는 연회에서 ‘각저희’를 하게 했다고 한다. 이들 기록에 보이는 “씰흠”과 ‘각저희’가 오늘날의 씨름과 유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씨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05년 발견된 각저총의 현실에 있는 벽화이다. 씨름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어 각저총이라고도 한 이 무덤의 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씨름을 즐겨했는지를 보여주는 시각자료이다. 고려시대 충혜왕은 용사들이 씨름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고 하며, 세종대왕은 강에 배를 띄우고 강변에서 군사들이 씨름하는 광경을 즐겼다고도 한다. 단원 김홍도의 씨름하는 광경이 그려진 풍속화는 대표적인 민중의 스포츠로서 씨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인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씨름은 누가 했을까? 각저총이나 각종 기록에서 보면 씨름의 주체는 주로 용사들이나 군사들로 표현된다. 이는 씨름이 무예로서 출발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힘으로만 상대를 제압할 수 없는 기술의 싸움으로 전투를 치뤄야 하는 군인들에게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씨름은 정예화된 군사훈련은 아니지만 군인들이 즐기는 또는 권장되었던 수련의 일환으로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후기 김홍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단오나 추석등의 명절 때에 마을과 마을사이의 시합을 대표하는 경기(스포츠)로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때문에 씨름은 곧 민중, 백성들의 경기로 인식되는 것 같다.

 

그러나 양반들 역시 씨름을 즐긴 것은 아닐까? 양반들이 씨름을 즐겨했는지 아니 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1803년 김상묵이 보낸 편지를 보면 씨름이 결코 백성들의 경기만은 아닌 듯하다. 김상묵이 김정희에게 보낸 편지 속에는 “가르쳐 주신 28가지의 기술은 잘 배웠습니다. 우승해서 소를 타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으로 양반이 씨름을 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양반이 씨름과 무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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