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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혁명가 정여립과 선비들의 전쟁 재조명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신정일 지음...다산초당

대동사상에 관심을 갖고 정여립 역모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문화사학자 신정일씨. 현재 (사)우리땅 걷기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desk@jjan.kr)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역사의 격랑에 과감히 뛰어든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연 주역들이었고, 역사를 진보하게 만든 힘의 원천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잊혀졌던 광주의 기억을 되살렸고, 전북에 터를 잡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문화사학자 신정일씨가 정여립과 죽어간 1000명의 선비들을 귀환시켰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

 

조선 역사상 신원되지 못한 천재가 두 명 있다고 한다. 허균과 정여립. 당대 문사철을 고루 갖춘 아름다운 선비라 불렸으면서도 족보에서조차 지워져야 했던 비극적 인물. 역사는 그들을 왜곡해 왔다.

 

책에 실린 조경남의 발언을 빌리자면, 정여립은 ‘전주 사람으로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엎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와 집에 있으면서 고매하고 자중해 관직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가지 않았다. 선비들은 달려가서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여립은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했으나 나중에는 동인에 가담해 이이와 성혼을 비판했다. 이로 인해 왕의 미움을 사고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낙향한 뒤에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진안군 죽도에 서실을 세우고 사람들을 규합해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으며, 1587년에는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1589년 정여립 일당이 한양으로 진격해 반란을 일으킨다는 고발에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자살했다.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동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됐고,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땅이라 불리게 됐고,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됐다.

 

정여립에 대해서는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는 「정감록」의 참설을 퍼뜨려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보기도 하고, 반대로 왕권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 사상을 품은 사상가로 서인과 동인 사이 당쟁의 희생자로 보기도 한다.

 

책은 제1부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과 제2부 ‘비망록-기축옥사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로 구성됐다. 1부는 정여립을 중심으로 조대중과 김빙, 서산대사와 사명당, 노수신과 백유양, 이이와 성혼, 유성룡과 이항복, 정철과 최영경, 송익필과 이발, 정언신과 정언지, 이산해와 조헌, 박순과 정개청을 조명했다. 2부 비방록에는 ‘실패한 혁명인가 억울한 옥사인가’ ‘논쟁의 불꽃이 튀다’ ‘반역의 고향에 관한 이야기들’ ‘아름다운 꿈, 대동’ 등 기축옥사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이 정리됐다.

 

문화사학자 신정일은 1985년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들을 펼쳤다. 대동사상에 관심을 갖게돼 정여립 역모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 그는 하루 16시간씩 책을 읽으며 수년간 고증 끝에 이 책을 탈고했다고 한다.

 

혁명의 성패는 결국 때를 잘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반만년 한국사에서 기회이자 위기였던 16세기에 ‘기축옥사’가 일어남으로써 그 역사적 운명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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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휘정 desk@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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