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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호수·인구수 실태 파악한 문서 '통표(統表)'

1897년 운봉군 북하면 일대동 제4통의 통표. (desk@jjan.kr)

호적법이 폐지되면서 이제는 호적이 가족관계등록부로 바뀌게 된다. 전통적으로 호주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구성을 토대로 사회시스템이 만들어져 왔기 때문에 당분간의 혼란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호적’의 역사는 국가 재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발전해 왔다. 누군가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만들어 지게 되면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그 구성원으로부터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행된 것이 호적제도이다. 따라서 그 역사는 고대사회로부터 출발하였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장적이라 불리는 ‘신라촌락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戶)의 관리는 백성들을 호의 단위로 묶어 조사 관리하고, 각각의 개인과 호를 세금의 부과단위로 삼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세한 파악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호적에 대해 일반적으로 ‘전통’이라고 느끼는 내용, 예컨대 호주를 호(戶)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가부장제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등은 사실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의 호적제는 부부에게 동등한 기재양식을 부여하고 있다. 부부 모두 부(父)·조(祖)·증조·외조 등의 4조(四祖)를 모두 기재하게 한 것이나 여성 혼자서 호를 대표할 수 있었던 것 등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전통적 호적제는 사실 대한제국기 이후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호적제도의 성격상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 대한제국의 시작과 함께 호적제도에 대한 개편이 바로 시작된 연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대한제국기에 들어와서 조선시대의 호적대장인 호적, 호구단자, 준호구 등은 각각 민적(民籍簿)와 호적표로 대체되지만, 통표(統表)는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통표는 조선시대 5호를 1통으로 만들어 통수(統首)를 둔 오가작통법과 관련이 있다. 오가작통법이 실제 어떻게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내용이 없으나 호구의 운영과 관련해서 보면 질서정연하게 운용된 것은 아닌 듯하다. 반면 대한제국 이후에는 통수가 해당 통내의 호주의 호적을 조사하여 이에 의거하여 각 명목대로 기입해 넣은 것이다. 통표는 호적표와 함께 해당 관청에서 모아 수정하고 분적(分籍)하여 수시로 호구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호수와 인구수를 항상 정확하게 파악해 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종래 호주가 제출한 자료에 통수가 작성한 자료를 함께 활용한 것이다.

 

통수에 의해 작성된 통표는 면존위(面尊位) - 면집강(面執綱) - 해당 지방관청을 거처 중앙부처인 내부(內部)에까지 보고된다. 각 단계별로 원본을 보존하고 등서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즉 각 통표는 몇장의 복본이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인구와 세원의 확보를 위한 통표의 등장은 효율적이고 과학적이라는 ‘근대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통표의 등장이 곧 근대의 출발은 아니겠지만 근대적 국가재정의 수립이라는 측면에서 파생된 근대적 시스템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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