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사·암행어사에게 올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장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거의 유일한 출세의 길이었기 때문에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과거에 평생을 바치다시피 하였다. 예컨대 고종 27년(1890)의 문과에 급제한 정순교는 당시 만 85세로 조선조 1만 4천여명의 문과급제자 중 최고령자였다. 생원 진사시로 가면 훨씬 더 많은 고령자들과 만나게 된다. 조선 말기에 갈수록 생원 진사시 응시자 중에는 고령자가 많았으며, 그들에 대해서는 성적과는 관계없이 특별히 합격자 명단의 말미에 추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기도 했다. 고종 11년 원자의 탄생을 기념하여 실시된 생원 진사시에서는 80세 이상의 고령자라는 이유로 1차 시험(초시)의 합격만으로 생원 또는 진사의 학위를 받은 사람이 무려 75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최고령자는 95세였다. 그러니 초시에 합격하지 못한 응시자 중에는 이보다 몇갑절 많은 고령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과거에 전념하다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천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과거의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지만, 평민들이 제대로 시험을 치를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결국 돈이었다. 특히 서울에 있을 수록 응시의 기회가 많고 그만큼 합격의 가능성도 많았으므로 지방의 응시자들 중에는 서울에 올라 와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치고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과채(科債)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오늘 소개하는 의송 문서에 나오는 조동술의 집안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의송은 백성들이 관찰사나 암행어사에게 올린 탄원서를 가리킨다. 전라도 영암군에 살던 그는 무자년에 순찰사에게 의송을 올려, 과채에 얽힌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있다. 과거에 뜻을 두었던 그의 아버지는 여러 해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급제는 고사하고 끝내는 빚을 갚기 위해 문중의 제사를 위해 마련한 위토답(位土畓) 14마지기를 같은 고을의 유창언에게 저당잡히고 3백냥을 빌려야 했다. 그 돈으로 빚은 갚았으나 낙제에 한이 맺혀서였던지 그는 얼마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 조동술과 그의 삼촌은 위토답을 되찾기 위해 수년 동안 고용살이를 하면서 갖은 고생 끝에 돈을 마련하고, 유창언을 찾아가 논을 되돌려달라고 하였다. 유창언이 이를 거절하자 조동술은 관에 문서를 올려 논을 되찾을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 관에서는 돈을 받고 되돌려주라는 결정을 했지만 벌써 오래 전의 일이 되고 보니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유창언으로서는 이미 제 것이나 다름없는 논을 헐값에 돌려주어 손해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조동술의 진정서가 그 뒤에도 몇 차례 더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유창언의 버티기는 그 뒤에도 계속 되었던 것 같다. 과거 때문에 집안 말아먹는다는 소리가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유호석(전북대박물관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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