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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고문서의 근대화?

일제강점기에도 문서양식 그대로

1924년 진안 백운면에서 올린 장중식 효행 표창 청원 소지. (desk@jjan.kr)

고문서란 옛 문서를 말한다. ‘옛’이라는 게 어느 때까지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약간씩 다르지만 1910년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즉 조선시대의 문서를 생산하는 전통이 대한제국기를 거치고 일제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소위 ‘식민지적’으로 변화하였다는 지적이다. 때문에 일제시대의 문서들을 기록학의 범주에서 다루어야 하며 고문서라 할 수 없다는 지적인 것이다.

 

1910년 기점에 대한 또 다른 인식기반은 소위 ‘근대화’이다. 이는 전통사회에 대한 고답적인 시기구분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어 근대는 1894년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문서에 대한 제반 규정 역시 분명하게 갑오개혁을 전후로 변화하였다. 다만 갑오개혁기에 대한 평가는 개혁으로 도출된 근대성보다 전근대적 요소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하고, 개혁 후 곧 일제 식민지라는 거대한 분기점을 맞기에 고문서는 1910년 이전의 문서로 규정된 것이다.

 

그런데, 법률을 만들어서 제도를 변화한다 해도 실 생활에서의 변화로 이어지기까지는 무던한 시간이 필요하다. 공적인 기관에서 사용하는 문서의 양식이나 작성방법 등은 제도로 쉽게 변할 수 있었겠지만, 백성들이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다. 전통적인 문서작성의 근대화는 몇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문서의 규격이 통일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서식화된 용지에 필요한 내용만 써 넣었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는 문서의 생산 유통정보가 표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1910년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단 시일 내에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기록의 근대화는 식민지 지배의 필요에 의해서 가속화하면서 기록문화전통의 식민지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위에서 소개한 문서는 1924년에 진안군 백운면 각 구(區)에서 올린 청원서이다. 동창리 김사언 등 9명의 연명으로 원탄곡리에 사는 장중식의 효행을 표창해달라고 백운면장에게 올린 것이다.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소지와 동일한 형태로 작성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백운면장의 처분(판결) 역시 조선시대 그대로 쓰여져 있다. 조선시대와 다른 점은 일본왕 다이쇼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과, 처분에 면장의 관인을 사용하였다는 정도이다.

 

문서의 근대화 과정과 일제 식민지성의 관계는 어떠할까? 수십년이 흘러도 고문서의 시기구분은 계속 1910년에 머물러 있을까? 일제 강점기 이후 문서들은 주로 어떻게 변화하기 시작하였을까? 앞으로는 이런 점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정부조직을 바꾸기 위해 몇 달간 지루한 싸움이 결판이 났다. 조직은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기에 조직이 어떻게 바뀌든 국가기록은 계속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BBK, 도곡동 사건 등의 무혐의와 삼성의 조직적 은폐를 보면서 새삼 기록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제시대는 그런 점에서 ‘기록의 암흑기’일까?

 

/홍성덕(전북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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