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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비단에 쓴 보은의 글

중국에 대한 '맹목적 추종' 과 '禮 중시' 사상 사이

1726년 송준길이 모사한 명나라 의종황제 친필 (desk@jjan.kr)

'글 숲을 거닐며, 묵향(墨香)에 취하다'라는 전북대박물관 특별전에 조금은 특별한 문서가 소개되었다. 숭정황제어필이라는 제하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씨이다. 남색 비단에 금으로 쓴 이 문서를 문서로 보아야 할 지, 서예작품으로 보아야 할 지 조금은 모호하지만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에 가깝고, 수발신자가 없다는 점에서는 후자에 가깝다. 문서라는 것이 굳이 종이여야 한다면 이것은 문서는 아닐 것이다.

 

사진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전시유물은 숭정황제의 친필은 아니다. 황제의 친필을 모사해 놓은 것이다. 글자를 쓴 주인공은 명나라 숭정황제인 의종이다. 의종은 17세에 황제에 오른 뒤 1627년부터 1644년까지 재위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이다. 후금과의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했고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자금성 북문 바로 건너 산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한 불운의 황제이기도 하다.

 

이 의종황제의 글씨가 우리나라에 오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이 유물의 아래부분에 송준길이 쓴 기문을 보면 중국에 연행사로 갔다 온 민정중이 가지고 온 것이라 한다. 민정중은 사행길에 '비례부동'이라 쓴 의종황제의 글을 가져와 송시열에게 주었고, 송시열은 그 글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의 암석에 새겨 넣었다. 후에 그 제자에 의해 만동묘가 세워져 현존하고 있다.

 

중국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인해서,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게 해 준 은혜(再造之恩)'를 베푼 나라로서, 후금이 세운 청나라의 등장 이후 중원의 정통성을 지닌 마지막 국가로서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잊지 못하는 성의'를 표현해야 하는 대상으로 미화되었다. 청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거부하여,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숭정기원후몇갑자' 식으로 대한제국이 들어설 때까지도 명나라 마지막 연호를 계속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의종황제의 글은 송시열에게 전해지면서 목판으로도 제작되었다. 이 유물을 제작했던 송준길의 글에 의하면 민진원의 집에서 의종의 글을 보고 '보배로운 글씨가 새것과 같아 재차 삼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봉행하였다고 한다. 송준길은 비단에 의종황제의 글을 정성스럽게 베껴 옮기고 그 아래 연유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아울러 별도로 목판을 새기의 추모의 마음을 기리도록 하였다.

 

이 때는 의종황제가 즉위한지 99년이 되는 1726년이었다. 1세기가 넘도록 중국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으려 했던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부끄러운 추수주의나 숭모사상의 역사일까, 아니면 예를 중시했던 조선시대 양반들의 삶이었을까. 의리와 명분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했던 당시대 지식인들에 있어, 일본의 침략에 보여준 중국의 행동을 은혜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명나라가 멸망한 뒤 조선을 '소중화'라 하여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놓았던 그들의 사상을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는 금융의 한파에 곰씹어 생각해 볼 여지는 없는 것일까?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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