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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토지 매매문서

명암 엇갈린 어느 과부와 양자의 삶의 궤적

1630년 김식의 아내가 콩밭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문서. (desk@jjan.kr)

한 장의 고문서만으로는 많은 걸 알 수 없지만, 그 연결 고리를 쫓아가다보면 뜻하지 않은 이야기들과 마주칠 수 있다. 그림에 보이는 문서는 숭정 3년 즉 1630년(인조 8) 3월에 남원에 사는 김식(金軾)의 처 김씨가 유학 오익빈(吳益賓)에게 콩밭 3마지기를 팔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종 6품의 현감으로 관직생활을 마감한 김식은 끝내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으며, 생전에 그리 큰 재산도 모으지 못했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했던 그는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문서에 증보, 요즘으로 말하면 보증인의 자격으로 매매에 입회하여 서명한 김정건이 그 양자이지만, 그 역시 문과와는 인연이 멀었다. 대부분의 양반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무직의 유학이었다. 따라서 남편이 죽은 뒤 아내는 곧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같다. 관아에 내어야 하는 전세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궁리 끝에 남편이 생전에 매입하여 갈아먹던 콩밭을 팔았다. 아마 그것이 그녀의 수중에 남아 있던 얼마 안되는 재산의 거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그뿐이다. 다른 어느 문서에서도 그녀의 후일담을 들을 수 없다. 대신 그녀의 콩밭을 샀던 오익빈에 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가 남아 있다. 관련문서에 따르면 그는 이보다 2년 전인 1628년에 참봉 오정수(吳廷秀)의 아내 오씨에게 입양되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남편의 6촌형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맞아들였다. 입양의 사실을 예조에서 확인하고 이를 공증하여 문서로 발급한 것이 '입안'인데, 그 문서가 다행히도 남아 있어서 이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2년 뒤에 오씨가 아니라 양자 오익빈의 이름으로 3마지기의 밭을 사들였으니, 아마 그는 늙은 양모를 대신하여 재산권을 행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오익빈은 다시 4년 뒤에 모습을 드러낸다.

 

 

1634년 오정수의 가족들이 모여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한 화회문서에 오익빈은 오씨의 대자(代子)로 적혀 있다. 4명의 노비들을 나누어 가진 것은 오씨와 이수신의 처 김씨이지만, 문서에는 그들의 대자인 오익빈과 이익형이 그들을 대신하여 문서에 수결 즉 서명하였다. 이 무렵 오씨는 생존하고 있었지만 양자인 오익빈이 사실상 집안을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오익빈의 결혼관계는 손씨집안에서 재산을 분배하면서 작성한 화회문서에서 드러난다. 오익빈은 손씨 가문의 막내 사위로 재산 분배에 참여하였다. 그의 아내 손씨는 이 집안의 막내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무렵의 남녀균분 상속관행에 따라 전답과 노비들을 처가로부터 상속받았다. 이제 오익빈에 관한 마지막 문서에 대해 말해야 되겠다. 어느 때인가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의금부 도사를 지내고 있었던 말년의 그는 30년간 동거동락하였지만 자식 하나 얻지 못했던 첩에게 기와집과 전답을 떼어주며 그녀를 위로하였다. 그러면서 단서를 하나 덧붙였다. 그녀가 죽은 다음에 일부는 정실에게서 난 아들에게 되돌려 주기로.

 

/유호석(전북대박물관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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