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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춤은 조갑녀의 춤이 제일이여" - 조상진

조상진(본지 논설위원)

감동적인 무대였다. 그리고 조마조마한 무대였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가 박수를 넣기 시작했다. 악사의 시나위 가락에 맞춘 추임새 장단이었다. 순간, 60여 년의 세월을 건너 '열아홉살 춤'이 부활했다.

 

슬쩍 슬쩍 몸을 흔드는 것 같았다. 한 손은 뒷짐을 지고, 한 손은 쭉 뻗으며 허공을 갈랐다. 손바닥이 안팎으로 꺾이면서 하늘이 내려왔다 저만치 물러갔다. 치마를 추어잡고 한 발 내딛으며 주춤, 또 주춤. 그럴 때마다 땅도 숨을 죽였다….

 

고작 5분 남짓, 연희자(演戱者)는 무대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직전에 승무와 한춤(허튼춤)을 추었던 딸들이 붙잡아 세웠다. 이번에는 세 모녀의 춤사위가 이어졌다.

 

이날(7일) 무대의 주인공은 87살 조갑녀 명무(名舞). 열아홉 꽃같던 처녀는 망(望)구십에 다시 예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평상시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 못하던 조씨였지만 이날만은 예외였다. 이날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은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650여 객석이 꽉 채워졌다. '살아있는 전설'을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일찌기 조씨는 남원의 스타였다. 남원권번 선생이었던 부친과 고모의 영향을 받아 6살부터 예능을 익혔다. 소리에서 악기와 춤, 활쏘기까지 배웠다. 소리는 판소리 다섯바탕을 뗐다. 춤은 이장선(1866-1939)에게서 배웠다. 전남 옥과 태생인 이 선생은 대원군으로 부터 춤과 취악으로 종9품 참봉 벼슬을 제수받은 당대 최고의 예인이었다. 스승은 조씨를 보고 "몸에 춤이 들어있다"면서 별도로 가르쳤다.

 

그 덕분인지 조씨는 이른 나이에 이름을 떨쳤다. 1931년 광한루 누정앞에서 펼쳐진 제1회 춘향제에서 화무를 추었다. 이후 11회까지 궁중무 승무 살풀이춤 등으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13살에는 승사교 준공식에서 춤을 추며 제일 먼저 다리를 밟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용북중 3학년이던 소설가 윤영근(예총 남원지부장)은 그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을 생생히 기억했다. "춤이라면 조갑녀를 따라올 사람이 없제. 아, 조갑녀가 승사교 개통식날 승무를 추면서 맨 처음 다리를 건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더라니까."

 

하지만 훨훨 날아오르던 조씨의 춤은 19살에 그만 마음속에 묻어야 했다. 아버지가 작고하고, 남원 갑부 정종식씨와의 결혼으로 가정에 들어앉았기 때문이다. 이후 12남매를 알뜰히 키우며, 혹여 남편과 자녀에게 춤을 추었다는 것이 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해 춤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냥 놔둘리 없었다. 1971년 광한루 완월정 낙성식과 2007년 서울세계무용축제 등 몇차례 춤을 선보였다.

 

조씨의 춤은 흔히 알려진 전통춤과 다르다. 세상과 단절했기에 조선시대 말부터 일제 초기의 춤사위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남원 국악의 대부 이상호(남원국악예고 이사장)는 조씨의 춤을 일러 "남원에 광한루가 또 하나 생겨난 것"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살풀이는 신문지 한장 위에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최고의 춤이라고 덧붙였다.

 

지금 전통 민살풀이춤은 조씨 외에 군산 출신 장금도(81) 명무가 유일하다. 장씨 역시 아들 하나를 위해 춤을 숨겼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분이다.

 

이제 이분들의 삶은 얼마남지 않았다. 우리 춤의 원형이 발견되자 마자 부스러지는 보물이 되어선 안되겠다.

 

/조상진(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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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진 chos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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