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명사회를 가능케 만든 최초의 혁명은 농업이었다. 동물 수준의 방랑 생활을 하던 인간이 정착생활과 함께 인지를 발달시킨 단초는 당시 인류로서는 획기적인 '농업 혁명'이라는 발명품 덕분이었다.
원시시대 이래 줄곧 인류과 함께 한 농업. 하지만 그 위상과 중요도는 날이 갈수록 곤두박질 치고 있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가 급속히 산업사회에 빨려들면서 우리네 사회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자리는 영 체면조차 서지 않는다. 불과 몇십년 전만해도 우리나라 경상GDP의 절반을 훌쩍 넘기던 농업은 이제 전체 2%대라는 초라하고 앙상한 몰골이다.
하지만 역대 정권들마다 농업 살리기는 단골메뉴에서 빠지지 않았다. 한때 우리나라 최대 기간산업이었던 농업과 농민을 정치가들 입장에서는 마냥 외면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문민정부는 농정을 구조개선하겠다며 42조원을 들이부었다. 국민의 정부도 이에 질세라 농민 부채경감, 추곡수매가 인상, 직불제 도입 등에 주력하며 45조원이란 거액을 예산에 배정했다. 농민과 소외계층에 관심이 높았던 참여정부 역시 예외는 아니다. 도농간 균형발전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40조가 넘는 돈을 투융자 형태로 농촌에 쏟았다.
숱한 정권의 노력에도 농업이 사양산업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 농업은 이대로 사망할 것인가.
최근 농업의 현장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들이 무럭무럭 싹을 틔우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았다.
첫 번째 사례가 부안군에서 거베라 작목반을 이끌고 있는 60대 농부이다. 벼농사를 비롯 고추농사, 오이농사 등 농업의 온갖 풍상을 겪어온 이 농부는 몇 년 전부터 화훼에 뛰어 들어 연간 6000-7000만원의 안정적인 순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 농부의 성공 요인은 남들이 가지 않은 외로운 길을 과감히 선택했다는 점이다. 물론 새로운 분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경영 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쁜 꽃도 즐기고, 돈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라며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이 농부가 켜켜이 쌓아온 고정관념을 흔들었다.
또 다른 사례는 익산의 한 영농조합법인. 12년간 건설업을 정리하고 농업에 뛰어들어 영농조합법인을 만든 이 농부가 선택한 작목은 농업분야에서 가장 흔한 벼농사. 하지만 여느 농부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건설업에서 몸으로 익힌 마케팅 개념을 농업에 도입한 게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는 판단이다. 서울 부자들을 겨냥한 가마당 100만원 짜리 쌀농사에 이미 착수했고, 조선시대에 재배했던 토종 볍씨를 찾아내 시험재배에 들어갔다. 토종벼는 가마당 600만원에 팔겠다는 야심찬 청사진까지 그렸다.
이들 농업인들의 공통점은 남들이 가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길을 선택, 이곳에서 보물을 찾기 위한 노력을 쏟아냈다는 점이다.
농업 살리기는 거창한 예산, 화려한 슬로건과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 농업인들이 농업 현장을 누빌 때 농업은 머지않아 감춰진 탈출구를 활짝 열고 새로운 비상의 날개를 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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