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꽃 나무와 함께한 만년 청년을 기억하다…제자들이 고인 연구활동 정리
70년간 우리나라의 산은 안 올라가 본 데가 없었던 사람. 제주도 한라산은 250번, 백두산은 20번쯤 답사했다.
고인이 찾아낸 식물의 학명에 영문이름 머릿글자를 딴 'Y. N. Lee'가 붙는 것만 해도 250여종.
지난해 6월 타계한 '한국 식물학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군산 출신 이영노 한국식물연구원장의 일생을 집대성한 유고 화보집 「식물학자 啓宇 이영노」가 출간됐다.
제자들이 평생을 청년처럼 살며 식물학 연구의 외길을 걸어온 고인을 기리기 위해 의지를 모은 작업.
고인이 지난 2006년 「한국식물도감」 개정판을 냈을 때 제자들이 출간 축하파티를 열자고 하자 "이제야 식물에 눈을 떴다. 10년 뒤 다음 개정판을 낼 때 하자"고 사양했다고 했다. 그의 갑작스런 별세에 제자들의 아쉬움은 더욱 컸을 터. 고인의 생전 모습을 기리며 화보집 출간을 기획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제자인 오병운 한국식물분류학회장은 "선생님은 '내가 이 길을 걸으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이 길의 끝자락에서 무엇을 남겨야 하나'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고인이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36년 전주사범학교 시절 일본인 교사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왕벚나무 꽃봉오리 관찰도를 그리라고 했는데, 전교에서 그의 것이 제일 잘 그려졌다고 게시판에 붙었던 것. 그때부터 고인은 식물에 빠져 들었고, 교사생활을 하면서도 식물 연구의 꿈을 못 잊어 결국 뒤늦게 서울대 사대 생물과에 진학했다. 미국 캔자스주립대를 거쳐 일본 도쿄대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6년까지 이화여대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평생 식물 밖에 모르고 살게 됐다.
영국 왕실 식물원, 베를린 자유대학 식물원, 스미소니언박물관 등에서 그에게 자료를 요청하고, 새 식물종의 감정을 의뢰할 정도였지만, 별세하기 전까지도 고인은 매주 2~3회 산을 다녔을 만큼 열정적인 탐구정신으로 살았다.
고인의 아내 장정원씨는 "올해가 그와 결혼한지 만 60년 되는 해"라며 "아마도 지하에서도 한결같이 식물연구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생전에 고인은 "아내 장씨는 자신을 평생 학문세계에서만 살게 해 준 베필"이라며 "그의 숨은 노력과 인내, 슬기로움으로 연구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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