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성(본지 기획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뭔가 있을 자리에 없으면 처지가 딱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해는 가지만 공감하기는 힘들다는 일상이면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올해는 우리 지역에서 여느 해처럼 불우이웃 돕기의 상징인 '사랑의 온도탑'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지난해 이때 나는 이 세상만사란에서 기부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번에는 바뀐 상황에서 그 분야를 들여다보고 싶다.
성금모금이 집중되는 연말이 다가오지만 그 실적이 뚝 떨어지고 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시민들 사이에는 "누굴 믿고 기부하나"라는 분노와 허탈감이 섞여 나온다. 국민성금을 관리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비리와 방만 운영이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성금을 직원의 술값이나 스키장·래프팅·바다낚시 비용에 함부로 사용한 사실은 푼돈을 모아 기탁한 시민으로선 기가 막히고, 지원을 기다리는 수혜기관들로서 억장이 무너질 일이 아닌가. 거론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이 같은 난맥상이 일부 지회·직원에 국한된 일이라고 하지만 시민들의 울분이 가라앉고, 모금활동이 정상화될지는 의문이다. 실제 공동모금회에는 이번 사태를 비난하는 전화가 빗발치고 기부를 취소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시민들이 엄청난 배신감에 사로잡히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기부문화의 확산에 찬물을 끼얹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다시는 이런 비리가 불거지지 않도록 철저한 제도적 장치와 운영체계를 갖추는 일은 우선과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동모금회의 비리 때문에 사회의 온정마저 식어서는 안 된다. 비난받을 대상이 엄연히 기부단체 임직원인데도 수혜자들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해서는 그냥 볼 수 없다. 기부행위가 그래도 계속돼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망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창구를 옮기면 좋을 성싶다. 말뚝이 바르지 않으면 그림자도 곧지 않기 때문이다.
기부는 개개인의 마음으로 결정하는 행위다. 그것은 '공감'이라는 의식이 전제에 놓여 있어야 가능하다고 본다. 공감이란 렌즈를 통해 기부행위를 들여다보면 그 자체를 연결시키는 인식이 높아지게 된다. 세계적 석학 제러미 리프킨은 최근작 '공감의 시대'에서 공감의식과 유대감을 이렇게 보고 있다. "공감의 순간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경험 가운데 가장 밀도 높은 생생한 경험이다. 공감의식이 성숙할수록 삶의 참여도는 더 막역하고 보편적이 되고 겹겹의 현실감은 더 깊어진다." 공감할 줄 몰라 경험을 제한받는 사람의 인생은 그만큼 충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공감은 기부를 위한 조건이다.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게 중요하다. 수동적인 동정과 달리 기꺼이 어렵고 힘든 경험과 느낌을 공유하는데 기부는 그 하나의 수단이다. 불우이웃이 나에겐 누구인가. 고통 속에서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존재이다. 도움의 손길을 느끼며 사는 그들이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공감을 통한 사회의 관용과 너그러움이다. 포퓰리즘이 아니라 그들을 나에게 마음으로 옮겨와야 한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기부를 하고 안하고 할 수는 없다. 당장은 불가능해도 최소한 그런 마음자세는 갖고 있어야 한다. 공감할 수 없다는 건 모두 핑계이고 억지이고 거짓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최동성(본지 기획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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