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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 ④나의 독서 유랑기(劉浪記)

나 어릴 적, 책은 부(富)의 상징이었다. 글을 깨치게 되었을 무렵부터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책을 좋아했지만 실제 책을 구할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집 형편에 전집은 꿈도 꾸지 못했다. 도서관 대여 역시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나, 그래도 독서의 중요성을 간파한 엄마는 일찌감치 어깨동무를 정기구독 시켜주는 용단을 내리셨다. 참으로 획기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월간지는 도착하자마자 한 시간 여만에 독파해버리고 다시 읽을거리에 목말라 했으니, 엄마는 그 다음단계로 읍내 유일한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즐거움을 알려주셨다.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꼭 읽고 싶은 책을 한 달에 한 권씩 사주셨다. 내가 처음으로 고른 책은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었다. 책이 닳도록 읽어도 흥미가 줄어들지 않았더랬다.

 

나는 언제나 책을 갈구했고, 책을 많이 소유한 친구가 최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신작로 건너 치과병원집 딸 화진이는 신작로를 경계로 동이 나뉘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지 못했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서쪽으로 창이 난 화진이네 2층 방 한켠에는 계몽사에서 나온 하드커버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누르스름한 색깔의 딱딱한 커버를 넘기면 반짝거리고 촉감좋은 종이위에 세계의 전래동화와 명작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내가 그 책들에 흥미가 있음을 알아차린 화진이는 인형놀이를 중단하고 내게 독서의 즐거움을 기꺼이 누리게 해주었다. 너그러운 성품의 화진이는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으며 꿈의 공간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녀의 안내로 만난 신밧드, 이솝우화의 동물들, 피터 팬, 괴도 루팡, 명탐정 셜록 홈즈 등이 책장 사이사이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때론 용감하게, 때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으로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숨 쉴틈을 주지 않았다. 소공녀, 신데렐라, 빨간머리 앤……. 소녀들은 눈물과 웃음을 함께 알게 했고, 장화홍련의 비극은 화장실을 두렵게 했다. 화진이는 설령 자신이 집을 비울 때도 언제든 집에 와서 편안하게 독서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를 잊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신작로 건너 화진이네 2층 집이야 말로 독서의 산실이 아니었나 싶다.

 

아들이 많은 외삼촌 댁에는 김삼 화백의 소년 007이 있었다. 명절 때 마다 찾아가서 사촌끼리 먼저 보려고 적잖은 다툼도 있었지만 곁눈질로 보고 내 순서에 다시 보는 재미가 삼삼했다. 만화 이야기를 하니까 이즈음 고백할 게 하나 있다. 우리 동네 제빙공장 입구, 좁고 삐걱거리는 의자, 어둡고 침침한 조명아래 목이 휘도록 만화에 몰입했던 양갈래 머리의 소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였다는 것을……. 그 조그만 만화 가게를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다. 만화에 탐닉해서 저녁시간도 놓치고 일일문제집도 슬그머니 찢어버리고 숙제를 밀려서 날을 새기도 했지만, 지금으로 치면 액션, 멜로, 공상과학 등 장르를 망라해서 다양한 스토리가 있었던 곳이니 이야기꾼으로서 자기계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리라 믿는다. 어쩌나! 그 추억마저도 감미롭다. 몰래 본 책이 더 맛있었나보다.

 

/ 김사은 (수필가·전 전북여류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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