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적당하다. 산속에는 100 리나 되는 길 골이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쪽은 넓어서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이 있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실린 글이다.
민족의 성산 지리산 자락에 고찰 실상사가 있다. 바래봉에서 부터 비롯된 임천강이 뱀사골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몸을 합치고 강물은 흘러가 경호강과 만나 남강이 된다. 해탈교를 건너기 전에 만나는 한기의 돌장승은 1963년 홍수 때 떠내려 간 짝을 그리워하는지 침울한 채 서있으며 다리를 건너면 1725년 무렵에 만들어진 돌장승 한 쌍을 지나게 된다.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의 산문인 실상사파의 본 찰로서 우리나라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국보 10호로 지정되어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과 약수암의 목조탱화를 포함하여 보물이 11점이나 있어 단일사찰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 흥척 증각대사가 구산선문을 개산하면서 창건하였다.
흥척은 도의선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는데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 보림사를 세웠고 흥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을 전파하였다. 풍수지리설에는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뒤 2대조 수철화상을 거쳐 3대조 편운에 이르러서 절이 중창되었으며 더욱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4년에 화재를 입은 후로 2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었고 스님들은 백장암에 기거하며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가다가 숙종 5년(1679)에 벽암스님이 삼창하였다.
1690년에 침허스님을 비롯한 300여명의 스님이 절의 중창을 조정에 건의하여 1700년에 36동의 건물을 세웠다. 그 뒤 1821년에 의암이 다시 중건하였지만 1882년에 함양 출신 양재물과 산청 출신 민동혁이라는 사람이 사적 감정으로 불을 질러 아까운 건물들이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은 뒤 그 이듬해 스님들이 십여 동의 건물을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건물은 보광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명부전, 칠성각, 선리수도원, 누각이 있으며 요사채 뒤쪽으로 극락전과 부속건물이 있다.
△ 삼층석탑·석등과 보광전
만세루를 들어서자 절 마당에 삼층석탑 두기가 눈을 맞으며 서있고 그 가운데에 석등과 보광전이 서있다.
보광전 양옆으로 약사전과 칠성각이 서있으며 석등 양옆으로는 명부전과 요사채가 서있다. 멀리 천왕봉을 바라보며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를 꽃잎으로 삼은 꽃 밥에 해당하는 자리에 절을 지었다는 실상사는 다른 지역의 절들과 달리 평지에 펼쳐져 있다.
보물 제 37호로 지정되어 있는 실상사 삼층석탑은 높이가 각각 8.4m이며 동탑·서탑으로 불린다. 실상사 삼층석탑들은 규모, 양식, 보존상태 등이 상륜부는 찰주를 중심으로 보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의 손으로 만들었는데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동탑은 용차가 약간 훼손되었고 서탑의 수연은 없어졌지만 나라 안의 석탑 중 상륜부가 이렇듯 온전하게 남은 예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를 만들 때 모델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동·서 석탑의 중간지점에 세워진 실상사 석등(보물 제 35호)은 높이가 5m에 팔각 둥의 전형적인 간주석과 달리 고복형 간주석을 지닌 석등으로 그 전체적인 형태가 화엄사 앞 석등이나 임실 증기사 석등과 흡사하며 이 지방에서 널리 유행되었던 석등으로 볼 수 있다. 8각의 지대석 위에 올린 하대는 이중으로 구획되어 하단부의 각 면에는 인상을 조각하였고 그 뒤로 잎이 넓은 연꽃 8엽이 조각되었다. 연꽃잎 끝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된 귀꽃이 높직하게 솟아있다.
하대 위에는 3단의 간주석 받침이 놓여있고 간주석은 3단의 마디로 층 급을 이루어 고복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돌출된 마디마다 중앙에 세줄 띠를 두른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에 단엽의 연꽃을 장식하였다.
마디와 마디 사이의 잘록한 부분에는 세 줄의 가로선이 둘러져 있고 상대 위에 올려진 화사석은 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석 위에 놓인 지붕돌은 낙수면이 단엽 연꽃으로 장식되어있고 연꽃잎의 끝에는 하대와 같은 귀꽃이 장식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 석등의 측면에는 등을 켤 때 오르내릴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된 석조계단이 남아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여러 석등 가운데 유일한 것으로서 석등이 공양구로서의 장식적인 의미와 함께 더불어 실용적 등기로 사용된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이 석등이 만들어진 시기는 실상사의 창건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있다.
크기가 장중하고 화려한 장식과 단정한 비례미가 돋보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이 석등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얼마나 간절한 염원으로 이 석등에 불을 밝혔을까? 그때에도 저 아름다운 석탑들은 그 불을 지피던 광경들을 그저 침묵한 채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생각하는 사이에 문득 보광전에서 독경소리 들린다. 실상사의 대웅전인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원래 있던 금당터의 기단 위에 또 하나의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작은 건물이다. 원래의 금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가 큰 건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보광전 안에 흥척대사와 수철화상의 영정 및 범종이 있다.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은 현종 5년(1664)에 제작되었으며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종을 치면 일본이 망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일본이 패망할 무렵 남원 경찰서에서 이 절의 주지를 연행하여 추궁하였다고 한다. 주지는 그 때 “종을 칠 때마다 그 은공이 일본까지 미치게 해달라는 뜻이다”라고 답변하여 풀려 나왔다고 한다. 또 하나 실상사에는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 당시 왜구가 남해안에 전라도 일대에 심심치 않게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던 때였다. 홍척은 도선에게 부탁하여 절터를 보게 했다. 그때 도선이 현재의 실상사 약사전 자리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약사전의 창호가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이고 약사전 앞에는 무궁화가 심어져 있다.
이 약사전에는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 꼽히는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높이가 260cm이며 보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철불은 두 발의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완전한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꽂꽂하게 앉아 동남쪽에 있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다. 현재 광배는 없어졌고 수미단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대좌가 아닌 흙바닥에 앉아있다.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의 수인은 아미타불의 하품증생인이므로 이 불상이 약사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고 있다.
△ 극락전과 증각대사 부도비
발길을 옮겨 극락전에 이른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실상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식포식 단층 맞배지붕이다. 이 극락전의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목각보살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 극락전 측면에 흥척증각대사부도가 있다. 흥척 대사가 입적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증각대사응료탑으로 불리고 있다. 전형적인 팔각원당형부도가 높이가 2.42m이고 보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증각대사 부도비는 비신은 없어진 채로 귀부 위에 바로 이수만이 얹혀있다.
오랜 풍화작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멸이 심하다. 그 당시 유행했던 용머리 비신이 아니라 거북이 모양의 이 부도비는 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태종무열왕비와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흥척대사의 뒤를 이었던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다. 수철화상능가보월탑이라고 불리는 이 부도는 전체 높이가 2.42m이고 보물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높직한 8각 지대석 위에 건립되어 있는 이 부도는 지대석 위에 아무런 굄대도 없이 곧바로 놓여져 있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으며 앞뒷면에 문비형이 조각되고 그 좌우 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부도 옆에 전체 높이 2.9m에 보물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철화상부도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 그리고 조성된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그는 신라말기의 선승으로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와 제2조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년) 5월 77세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였고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 이 실상사는 그 뒤 후삼국시대의 백제, 즉 후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 절 약수암 가는 길 옆 조계암 터에 편운화상의 부도가 바로 그것이다.
멀리서 보면 하얀 벙거지를 쓰고 있는 듯도 하고 커다란 송이가 피어있는 듯도 싶은 그 부도가 실상사의 3조인 편운화상의 부도이다. 희미한 글씨가 새겨진 그 부도를 자세히 살펴 보자.‘정개(正開) 경오 신년’이라고 쓰여 져 있고 편운화상이라는 이름이 뚜렷하게 보인다.‘정개’라고 쓰여 진 그 글씨가 후백제 견훤의 연호이다. ‘바르게 열고 바르게 펴고 바르게 시작 한다’는 뜻을 지닌 정개라는 연호를 처음 썼던 때가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열었던 900년이었고 편운화상의 부도가 세워진 것이 910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왕건이나 궁예와 달리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했었던 견훤 백제는 중국의 오월과 거란 그리고 일본과 교류를 했을 만큼 강성한 나라였지만 큰아들이 아닌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다 결국 아들이었던 신검, 양검의 쿠데타로 통한의 한을 품고 역사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물론 아들과의 내분으로 역사의 패배자가 되고 말았다는 세간의 평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도학 선생의 말대로 가장 임금의 자질이 있는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려고 했기 때문에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이 있겠느냐 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것이기 때문에 오래 전에 방송되었던‘태조 왕건’에서도 견훤은 허풍쟁이처럼 코웃음을 치기도 하고 궁예는 포악한 미륵으로 그려졌으니 그 역사를 누가 알고 누가 평하랴.
산수유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그곳에서 1km쯤 올라가면 사람들의 발길이 어쩌다 닿는 약수암이 있다.
백장암과 더불어 실상산파의 수행처로 오랜 세월동안을 자리한 약수암의 보광명전에 조선 후기 목조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정조 6년에 만들어진 이 목조탱화는 높이가 1.8m에 폭 1.9m로 보물 제 4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아미타불과 여덟 보살 두 명의 비구가 상하 2단으로 조각되어 있다. 조선후기 목조탱화의 기준작품이 된다고 볼 수 있는 이 탱화는 금분으로 도금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화려하면서도 분위기가 엄숙하다.
△ 백장암과 석탑
실상사를 나와 인월로 가는 길에서 가파른 산길을 1.1km쯤 올라가면 실상사의 산 암자인 백장암(百丈庵)이 있다. 국보 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 40호로 지정되어 있는 백장암 석등이 있는 백장암에는 현재 법당과 칠성각, 산신각 그리고 요사채가 있는데, 예전에는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 중에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석탑 양식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든 이형 석탑이다. 탑 전체를 두른 장식 조각들이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게 만들어진 이 탑은 통일신라 시기의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라 국보 제 10호로 지정하였으나 1980년 도굴범에 의해 여러 곳에 흠집이 생겼고, 그 뒤편에 다소곳이 서있는 석등 또한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도굴범에 의해 탑이 무너지면서 그 아름다운 탑이 여러 곳이 손상을 입은 채 서 있어서 찾는 이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백장암 요사채의 담 벽에 기대서서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지리산을 바라볼 때 오랜 도반인 조용헌 도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 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쳐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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